김화진 동행미디어 시대 고문


한 기업의 이사회가 새로운 투자기회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성공 확률은 40%정도지만 성공하면 회사가 2-3배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를 포기하는 경우 딱히 다른 프로젝트가 없어서 실적 하락이 예상된다. 이 경우 이사회는 60%의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결정을 해야 하는가. 실패하는 경우 이사들은 법률적 책임을 지는가.

"법관은 비즈니스맨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경영판단의 원칙'을 통해 법원은 이사회의 특정 사업상 결정에 대해 사법적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서 유래한 이 원칙은 우리도 판례로 도입한 상태이고 국회에서 입법이 논의되고 있다.



경영판단의 원칙에 의하면 회사의 이사들이 (1)개인적 이익을 추구함이 없이 (2)선의로 (3)합리적 수준의 정보에 입각해서 (4)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믿으면서 (5)적절한 절차를 거쳐 내린 사업상의 결정은 나중에 그 결과 때문에 법률적 책임의 발생 원인이 될 수 없다. 이사가 기업의 경영에 관해 내린 결정은 사안을 숙지하고 신중한 판단에 의해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의 원고는 그 추정을 복멸할 만한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오래전 미국에서는 디즈니 회장이 크게 잘못 내린 결정으로 회사에 2억 달러 규모의 손해가 발생해 투자자들이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나오자 '은하계에서 가장 멍청한 결정'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을 두고 파라마운트와 워너가 인수 경쟁을 벌였을 때도 타임 이사회는 주당 200달러를 제시한 파라마운트가 아닌 주당 100달러를 제시한 워너와 합병하기로 결정, 주주들이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이사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 판례도 2010년 이래로 이 원칙을 인정한다. 주식회사의 이사가 기업지배구조모범규준을 준수했다면 중과실이 없는 한 경영판단 원칙의 지원을 받을 여지가 크다고 한다. 단, 일본최고재판소는 은행 이사들에 대해서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보수적으로 적용한다. 은행의 공적 기능을 감안한 것이다.



독일도 경영판단의 원칙을 1997년 이래 판례로 인정하다가 2005년에 성문화했다. 주주의 권리가 신장하는 데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독일 학자들은 독일이 미국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현재 독일에서는 경영판단 원칙의 적용을 받기 위해 AI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다. '합리적인 수준의 정보'가 AI 사용 없이도 가능한가?

또, 독일법이 강조하는 것은 이사회가 사업상의 결정을 내릴 때 회사의 최선 이익을 위해 적절한 정보에 의거했는지 여부다. 물론, 이 요건은 최대한의 정보를 의미하지 않고 '적절한 수준'만을 요구한다. 결정의 시급성과 정보 확보에 소요되는 비용 등의 요소도 감안된다.

적절한 정보를 가지고 결정의 합리성을 믿는데 이르는 과정은 여러 절차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최근 서구에서는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절차 거버넌스'(procedural governance)다. 이사회 운영과 결의의 중점이 콘텐츠에서 절차로 이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는 '어떻게'다. 이제 법원은 소송이 제기되면 이사회가 올바른 사업적 결정을 했는지를 판단하는 동시에 이사회가 적절한 절차를 통해 그 결정을 내렸는지를 집중적으로 본다.

이는 당연히 기업 이사회의 운영에 영향을 미친다. (1)적절하고 충분한 정보에 의거해서 결정을 내렸는지 (2)결정에 수반되는 리스크관리가 충분했고 이해상충은 회피되었는지 (3)외부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는지 (4)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논의가 충분했는지 (5)반대의견이나 개별의견이 개진되었는지 (6)토의와 결정이 문서로 남았는지 등이 체크리스트에 오른다. 외부 법률자문의 역할도 커졌다.

문제는 이사회에 모든 정보가 제공되고 모든 사무가 적절히 처리되고도 결과적으로는 '나쁜' 결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절차에 중점을 두는 경영판단과 이사회 승인에는 훨씬 많은 자료와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결정을 신속히 내리는데 집중되어야 할 에너지가 훗날 책임질 일이 없도록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작업에 투입된다. 절차적 정당성이 올바른 경영판단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1990년 걸프전 당시에 미군이 설정한 폭격 목표물들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을 파괴해 국제법위반을 발생시킬 위험이 많다는 이유로 작전이 중단되자 딕 체니 국방장관이 "변호사들이 전쟁을 좌지우지한다"며 개탄한 일이 있다. 지금의 조류가 계속되면 그와 비슷하게 변호사가 기업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모양이 될 수 있다. 고문변호사가 조심하시라는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경영자는 많지 않다. 사외이사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준다. 경영판단의 원칙이 조속히 법제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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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고문은 회사법·자본시장법과 기업지배구조 분야의 권위자다. 독일 뮌헨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후 서울대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미시간대 로스쿨 석좌교수, 삼성증권 이사회 의장, 현대모비스 선임독립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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