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도 남자 몰라요!
사소한 거 하나부터 너무나 다른 남녀, 성우 서혜정 편.>
 
"눈을 떴어요. 오 마이 갓! 알람 소리를 또 듣지 못했나 봐요. 급출발해 달리는데 이런 우라질레이션! 신호에 걸렸어요. 위반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TBN 교통방송의 DJ이니까요."
 
케이블 채널 tvN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성우 서혜정이 최근 펴낸 첫 에세이집 <속상해하지 마세요>의 프롤로그 일부다. 그녀 특유의 남녀탐구생활 버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활자에서도 들려오는 듯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서혜정 편'에 찬찬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웃음 뒤로 또로록 눈물이 흐른다.
 
어린 시절 철거촌의 지붕도 벽도 없는 집에서 살면서도 엄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으며 성우의 꿈을 키웠고, 어려운 형편에 대학은 엄두도 못 낸 채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서울예전 작품 공모전에 나가 대상을 받으며 성우의 길에 들어선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삶'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원석도 좋지만, 구르고 깎이고 더러 채이기도 하면서 점점 둥글어지는 작은 조약돌로 사는 것도 좋았다"는 고백처럼, 소탈하고 진솔한 성우 서혜정과 만나 <행복수다>를 나눴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과 성공, 돈, 사랑 등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본다.
 
- <남녀탐구생활> 성공으로 행복하신가요?
 
▶<남녀탐구생활>의 히트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죠. 좋아요.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즐거워요. 하지만 이전에도 전 불행하지는 않았어요.
 
딸에게도 "엄마는 남들처럼 부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어요. 에세이에도 고백했듯 어려운 성장과정을 겪어왔기 때문에 남을 도우며 살고 싶어요.

성공은 어디에 포인트를 두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일반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아요. 대기업 회장님 얼굴을 봐도 그래요. 성공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라기보다 자기만족이 아닐까요?

예전에 아파트 경비를 맡아주셨던 아저씨 한분이 계셨는데요. 제 차를 보면 멀리서부터 부릉부릉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곤 하셨죠. 아파트단지의 각 가정 사정도 속속들이 꿰고 있었고, 늘 목소리가 크고 얼굴이 환하셨어요.
 
연세가 많아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전 성공하면 그분이 생각나요. 그분을 보면 늘 부러웠어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 성공 비결을 귀뜀해준다면?

▶요즘 질투도 많이 받지만, 제가 볼 때 전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요. 어떤 일을 할 때 쭉쭉 뻗어나가죠.
 
그런 현상은 아마도 집중력이 좋은 것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시크릿>에서 말하는 자석의 힘 같은 것 말이에요.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을 도와줄 사람이 오는 것이죠.

그러한 집중력은 영혼이 순수할 때에만 통해요. 욕심을 부리면 안돼요. 미국 드라마 <콜드케이스> 오디션 때도 그랬어요. 강력계 여형사 역을 맡고 싶어 오디션을 봤는데 한주가 가고 또 한주가 가도 연락이 없었어요. 그때 욕심을 부렸거든요.

그래서 기도를 했죠. 예전에 <X파일>도 했는데 이건 놔야지, 정말 탐나는 프로그램이지만 마음을 비우자 그랬죠. 그랬더니 합격했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집중하고 열망하되, 욕심을 버려라.'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작은 성공 비결입니다. 

- 그렇다면 인간 서혜정이 생각하는 돈(MONEY)이란?
 
▶30대엔 돈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좋은 것을 먹고 싶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행복이 아니에요. 요즘 저는 옷도 안 사 입거든요. 얻어서도 입어요. 밥도 혼자 있을 때는 거지같이 먹어요. 싱크대에서 된장하고 김치 꺼내놓고 서서 조금 먹고 말아요.

젊을 때는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어릴 때 못 살아서 방바닥에서 대충 먹고 치우던 게 싫었죠. 그래서 혼자서도 식탁에 한가득 잘 차려놓고 먹었어요. 하지만 이젠 나이가 들었나 봐요. 예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져요. 그것도 추억이더라고요.

또 많이 잃어보니까 물질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남녀탐구생활> 전에 한국 단편소설 100편을 오디오북에 담는 사업을 했다가 큰 부채를 졌어요. 그때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커다란 욕심 항아리를 비우게 됐어요. 부채가 많아지다 보니 안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깨달은 거죠.

이제 반세기를 살았는데, 앞으로 반세기를 더 산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부채는 부채고,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생각해요. 

- 성우로서 생각하는 좋은 소리는?
 
▶성우 중에도 탁한 소리, 허스키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발음이 정확해요. 감정 전달이 분명하죠.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묻어나온다고 생각해요. 아주 미성이라도 야비한 사람일 경우 그 목소리가 좋게 느껴지지 않아요. 반대로 목소리가 걸걸한데도 (소리가) 참 멋있게 느껴지는 사람은 그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좋은 목소리를 가지려면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해요.

우스갯소리로 성우들의 정신 연령은 열 두살이라고 해요. 다람쥐ㆍ토끼ㆍ새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동심에 동화되지 않으면 결코 자연스러운 소리를 낼 수 없어요. 토끼 눈을 보면서 대화를 하고 강아지의 배고픈 표정도 읽을 수 있어야 진짜 성우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예술 분야이지만 고흐의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아요. 그 사람의 맑은 영혼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 캐릭터에 영혼을 담는 연기는 어떻게?
 
▶배우들을 보면 간혹 촬영을 하면서 어떤 캐릭터 속으로 들어갔다가 못 나와서 자살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잖아요. 성우들은 그렇게 인물 속으로 들어가는 연기를 순간순간에 해야 한다는 게 큰 어려움이죠.

그런 면에서 저는 농담으로 후배들과 얘기할 때 '나는 하늘이 내린 성우'라고 해요. 어린 시절에 가난 때문에 참 고통스러웠는데, 가난 자체가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그로 인한 엄마와 아빠의 다툼이 더 힘들었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게 트레이닝 과정이 됐어요.

단칸방에 사는데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게 괴로워 그럴 때마다 책을 봤어요. 현실을 잊고 책으로 빠져버린 거죠. 그때 훈련이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성우로 만들어지기 위해 그런 과정을 겪게 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요. 

- 여자 서혜정, 엄마 서혜정은?
 
▶결혼생활에 성공하진 못했어요. 예전에는 서로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다른 부분에서 부딪혔을 때 이건 맞는 게 아니야 하고 돌아섰죠. 이제는 '예전에 제가 이렇게 했으면 조화가 잘 됐을 텐데'하고 되짚어봐요.
 
지금은 남자친구가 있어요. 나이가 들고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가 원하는 게 없고, 해줄려고만 하니까 더 좋은 만남이 되는 것 같아요.

5년 전에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또다시 만났는데 놀랍게도 서로 많이 변해 있었어요. 다시 만나니 둘 다 크리스천이 돼 있어 더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 결혼 생각은 없어요.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니까요.

아이들은 아들 딸 둘이 있는데 모두 학교를 다니지 않아요. 아들은 스무살인데 공부 얘기를 하면 토할 것 같대요. 배우가 꿈이죠. 그래서 극단에 들어가서 청소하고 벽보 붙이고 군대 갔다 오라고 했어요. 몸으로 부딪히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요.

딸은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뒀어요. 음악인이 되고 싶대요. 중졸, 고졸은 검정고시를 보고 토플공부를 해서 버클리음대에 가고 싶다고 해요. 그래서 "너의 뜻이 그렇게 원대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격려해줬어요.

저는 아이들을 방목하는 편이에요. 변명일 수 있지만 하나하나 간섭하지 않고 맡겨두죠. 예술인이 되기 위해 꼭 학력이 높아야 한다고는 생각 안 해요. 대신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것'이라는 걸 명심토록 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모가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든, 설혹 꿈꾸는 인생에는 실패하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