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1m 정도 되는 물웅덩이를 지나가는 순간 승합차는 갑자기 붕 떠올랐고 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1984년 8월, 천일평(65) OSEN 편집인은 한국일보의 야구전문 체육기자로 LA올림픽 취재 차 미국을 찾았다. 한 달간의 열띤 취재 끝에 귀국 전 3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천 위원은 당시 동료 일곱명과 함께 '죽음의 계곡'인 데스 밸리를 관광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전날 폭우가 쏟아져 더욱 위험해진 길을 달리던 승합차는 물웅덩이를 밟는 순간 수막현상으로 미끄러졌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그는 창문으로 튕겨나와 정신을 잃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너는 영원히 걸을 수 없어.”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하던 천 위원에게 전해진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체육기자에게 걸을 수 없다니. 절망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쉽사리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 온 그는 당연한 듯 현업에 복귀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돌아온 지 4년 만에 체육부장이 됐고, 이어 야구부의 신설과 함께 야구부장이라는 중책까지 떠맡았다. 2004년 1월, 한국일보-일간스포츠에서 정년 퇴직을 한 후에도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스포츠 서울 등의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가 하면 2005년에는 인터넷신문 ‘OSEN’을 설립했다.
장애도, 나이도 강한 의지 앞에 굴복시킨 천일평 편집인. <행복 수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초대했다. ‘영원한 현역’으로 누구보다 활기찬 인생을 꾸려가고 있는 천 위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Q. 평생을 기자로 살아왔다. 기자란 직업을 갖게 된 계기는?
A. 기자는 초등학교 4~5학년 시절, 아주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당시 우리집에서는 한국일보와 동아일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그때가 50년대 무렵이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평이 신랄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게 재미있었다.
1972년 말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면 기질적으로 남달랐던 것 같다. 청년 시절에는 월남전에 참전하겠다고 해병대에 지원하기도 했다.
1966년에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당시 나는 삼수 끝에 방황하던 중이었다. 전쟁터가 아무리 위험하다지만 목숨 걸고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참전이 쉬운 해병대에 지원했다. 실제로 여러번 참전 신청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참전을 하지는 못했다. 제대할 때 쯤에는 특별기동대에 근무 중이었는데 “여기가 베트남보다 더 힘든 곳이니까 굳이 멀리 갈 필요 없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아쉬움은 없다. 전쟁이라는 게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곳이고, 실제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동료들의 1/3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하늘이 정해 준 길인 것 같다.
제대 후에는 친구와 함께 일산에 친구 아버지 땅을 빌려 닭 키우는 농장을 운영했다. 규모는 당시 기준으로 최대였고,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았다. 그러나 사업 시작 7개월쯤 지나 덤핑 경쟁에 채여 무너졌다.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나 하자 했다. 그때 잘됐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Q. 결국은 그런 경험들을 겪으면서 스스로 단단해지는 과정을 거친 게 아닌가 싶다. 미국에서 큰 사고를 겪었을 때를 돌이켜본다면?
A. 나처럼 큰 사고를 당한 사람이라면 100이면 100 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걷지 못한다는 건 엄청난 불행이다.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일까지 어려워진다. 움직이지 못하니 잔병이 많이 따르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어릴 때부터 '뭐든지 할 수 있다' '지금 안되더라도 자꾸 하다 보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사고 후 5개월 동안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한테 "걷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목발로라도 걸을 수 있게 해달라"며 진짜로 목발 짚는 연습도 했었다. 하반신 마비는 아무리 상체 힘이 좋아도 목발을 짚는 게 불가능한데 나는 성공했다. 미국 병원에서도 나 같은 하반신 마비 환자가 목발을 짚고 걷는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목발을 짚기 위해서는 보조장치도 달아야 했고,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결국 휠체어를 타게 됐다.
무엇보다 종교가 큰 위안이 됐다. 1급 장애인이 되고 나서 거의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 속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가도 눈감고 기도하면 의지가 다져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Q. 최근 사회적으로도 우울증이나 자살이 문제가 되고 있다. 좌절이나 실패를 견뎌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A. 야구기자를 하다보니 수많은 경기를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SK와이번즈가 프로야구 1등팀이고 넥센 히어로즈가 꼴찌팀이다. 하지만 경기를 하다 보면 1등 팀에게도 2~3번은 실수를 하고 경기가 안 풀리는 때가 있고, 꼴찌 팀도 이를 만회할만한 찬스가 2~3번은 꼭 오게 마련이다. 아무리 큰 실패나 좌절을 겪고 있어도 언젠가 한번은 만회할 기회가 온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끔 나와 같이 사고로 장애인이 된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사실 이 친구들에게 필요한 건 의사의 처방이나 치료법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을 살아나가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얘기도 이들에게는 도움이 안된다. 그저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려고 한다. 자주 만나는 기회를 마련하고 가볍게 대하며 마음을 풀여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벌써 다친 지 26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이 친구를 볼 때마다 거꾸로 힘을 얻기도 한다. 이 친구들 마음이야 누군들 짐작이나 하겠냐 마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나 역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된다.
Q.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현역에 복귀했다. 휠체어를 타고서도 건강한 현역과 똑같이 일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A. 복귀하고 얼마 안 있어 스포츠 부서에서 꽤 중책을 맡았다. 이틀에 한번씩 야근하고 새벽 1~2시까지 근무했다. 일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지도 않았다. 꼭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씩 거나하게 하고 나서 헤어졌다.
나처럼 심한 장애를 앓고 나면 하루종일 통증이 있다. 24시간 따라다니는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진통제를 먹어보기도 하고 나름의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는 비교적 장년층이라 그렇게 일했는데도 어느 정도 몸이 버텨냈다. 건강한 사람과 똑같이 일하며 굳이 아픈 걸 티 낼 이유도 없었지만, 내가 힘든 데 일부러 건강한 척 하지도 않았다. 못참을 정도로 아프면 후배들이랑 얘기를 나누다가도 스톱을 시켰다.
정작 어려운 점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2억원 정도의 비용이 청구됐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될 때였는데 외국에서 다친 경우는 보상을 받기 힘들다고 했다. 산재 처리도 어려웠다.
기자 월급도 작고 아이들도 겨우 4~5살이다. 돈을 갚을 수 없다는 편지를 병원에 구구절절 써서 보냈다. 그래도 3~4년 정도 꾸준히 독촉장이 날아오고 부담이 컸다. 결국 2~3년 뒤에 미국 병원을 다시 찾아가 “외국 기자로 특별 처리했다”는 얘기를 듣고 마무리됐다.
Q. 은퇴 후의 인생 설계는?
A.장애가 있는 경우 은퇴 후에도 연금의 70% 정도가 보장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는 없는 편이다. 정년퇴직하기 1~2년 전부터 체력이 조금씩 달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성인병이나 잔병이 늘어나는데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을 할 수도 없는 몸이지 않나.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몸을 움직이며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늙으면서 쌓여가는 주름이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노인을 추하다고 여긴다면 그건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감추거나 아닌 척하기 보다는 그런 추함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늙으면 늙은대로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Q. 은퇴 후에도 ‘영원한 현역’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A. OSEN의 편집인으로 이름을 걸고 있지만, 한달에 한번 후배들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후배들의 기사를 봐주는 정도다. 칼럼은 꾸준히 쓰고 있다. 덕분에 용돈벌이는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세상 사람 모두를 끌어안고 살아가려는 편이다. 야구기자를 하면서 특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어왔다. 그 중에는 욕먹는 사람도 많지만 그런 이들까지 ‘왜 저런 성격을 갖게 됐을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그런 친구들이 많이 따르기도 했다.
남들에게 악질 소리를 들어도 지내놓고 보니까 그런 친구들에게도 장점이 많았고, 나 역시도 그게 세상 살기에 편했다. 은퇴 하고 보니 그 친구들이 모두 내 재산이 됐다. 물론 눈에서 멀어지니 지금은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후배들이 잘 따라주니까 그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