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흥행' 원인을 '정의가 부재한 한국 사회'로 돌리는 이들이 많다. 뭔가 화끈한 내용을 기대했던 이들은 윤리 교과서나 논술교재 같다고도 이야기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만만찮은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선택과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철학적 성찰 그 자체에 있다. 즉 이 책은 기대와 달리(?) 정의·불의를 단선적으로 대립시키며 확고한 명제로서정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정의와 불의가 두부 모 자르듯 간단히 구분되는 건 전래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 복잡한 현실에선 모든 게 그저 얽혀 있게 마련이니까.
느닷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언급한 것은 굴지의 통신기업이 벌이고 있는 옷과 관련한 자선 마케팅 캠페인 때문이다. '월드컵 응원티셔츠의 기적'이라는 이름을 단 이 캠페인의 골자는, 월드컵 기간에 입었던 붉은 악마 응원 티셔츠를 모아서 아프리카의 헐벗은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자는 것. 왕년의 월드컵 스타들이 출연한 대대적인 TV광고까지 방영되고 이 기업의 일선대리점들이 티셔츠 수집의 거점 역할까지 한 탓인지 이 캠페인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참 훈훈한 이 캠페인은 과연 아프리카 지역사회에 이로움을 주게 될까. 의도한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국제개발 이슈에 관심을 가진 한 블로거(http://cklist.egloos.com/)에 의해 제기됐고, 그 내용은 실로 우려할만한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문제점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막대한 물량의 티셔츠를 무료로 배포하면 아프리카 현지의 헌옷, 섬유 관련 영세 비즈니스에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는 점. 둘째, ‘Korea Fighting’ 식의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구호 물품으로 보내는 것이 문화적·윤리적으로 정당한가이다.
좋은 일을 하겠다고 시간과 돈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부은 입장에선 이런 문제제기가 다소 섭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의류와 같은 공산품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프리카에서는 구제 의류를 재가공해서 공급하는 스몰 비즈니스가 만만치 않은 경제적 효과를 낳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개발 국가의 지역 비즈니스에 마이크로 크레딧을 공급하는 키바(www.kiva.org)에 등재된 사회적 기업가들의 프로필을 봐도 이 같은 구제 의류업에 자신의 희망을 내건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백만벌의 티셔츠가 한꺼번에, 그것도 무료로 쏟아지는 것이 엄청난 리스크 요인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일회적인 마케팅 캠페인으로 대량의 옷을 보내 많은 사람들이 공짜 옷을 입게 되는 것의 효과가 클지, 지역 의류 공급 생태계가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의 부작용이 클지 고민해 볼 일이다. 더욱이 그많은 양의 옷이 지구 반대편까지 운송되면서 소비하게 될 물류에너지까지 고려하면 선뜻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워진다.
에코패션에 있어서 재활용과 재생은 가장 임팩트가 큰 방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 됐든 간에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의도한대로 지구에 이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그래서 가급적 지역적인 접근이 돼야 하고 일회적인 것 보다는 장기지속하는 생태계 조성이 목적이 돼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활용 패션디자이너는 런던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래번이다. 실제로 판매되고 있는 이 친구의 작품은 영국 해군이 쓰다 버린 낙하산이 주 원료. 낙하산 원단의 견고함과 고유한 물성을 세련되고 위트있는 테일러링으로 소화한 래번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끝으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한국공수부대에서 폐기한 낙하산 원단을 구매해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기부해 주실 착한 기업 없습니까? 아프리카 대륙 헐벗은 아이들의 최루성 이미지는 없지만 무엇보다 지구에 이롭고 창의적인 작업은 가능한데… 관심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