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못지않게 그는 장례식장에서도 여느 이들과 달랐다. 가족과 자녀들이 있었지만 빈소도 차려지지 않은 채 마지막 육신은 영안실에 머물렀다. 이틀 뒤 서두르듯 발인이 마쳐지고 화장을 통해 한줌 재가 됐다. 평범하지 않은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 이는 46세의 이재찬 씨였다.
# 1992년 1월20일 당시 언론들은 250억원대의 상속세를 납부한 한 재벌가의 이야기를 다뤘다. 당시까지의 상속세 납부 규모 중 역대 2위였다. 1991년 타계한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의 가족들이 254억원의 상속세를 납부했다는 내용이었다. 상속 재산은 주로 주식(제일합섬, 새한미디어 등)으로 450억원대에 육박한다고 평가됐다. 200억원어치의 주식과 부동산이 남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가족들 중에 한명은 바로 이재찬 씨였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인 그는 당시 28살이었다.
18년의 간극을 두고 이재찬 씨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 회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비극적인 이야기 뒤에 재벌가의 영욕과 격동의 세월이 담겨 있다. 연대기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봤다.
■1960년대
1966년, 이재찬 씨가 두살, 그의 아버지 이창희 씨가 33세 때였다. 당시 정계와 재계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이었다. 한비 사건이란, 삼성이 연산 33만t 규모의 비료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요소비료 공정에 쓰이는 사카린 원료를 밀수입해 시중에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이창희 씨는 아버지(고 이병철 삼성 회장)를 대신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풀려난 뒤 아버지의 경영복귀 등 여러 일이 얽히면서 이창희 씨는 그룹을 떠나게 됐다. 1969년 일이었다. 당시 이창희 씨가 아버지의 비위 사실을 청와대에 고발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1970년대
이창희 씨는 삼성에서는 떠났지만 사업가로 재기를 꿈꾸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73년 미국의 화학·전자재료회사인 MMC사와 합작으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새한미디어의 전신)를 세운 것이다.
이창희 씨 가족과 직접 연관은 없었지만 한해 앞선 1972년 삼성이 제일합섬을 설립했다. 혼방, 방적, 폴리에스터 등을 주로 생산했고, ‘제일’이라는 사명이 상징하듯 삼성의 주력 계열사였다. 삼성전자가 현재의 위상이 아니던 당시 지금도 사명이 유지되는 제일모직, 제일기획, 삼성물산과 이름이 바뀐 제일제당(현재 CJ제일제당) 등이 삼성의 대표 계열사였다.
■1980년대
제일합섬은 증설을 거듭했고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는 1980년 새한미디어와 통합됐다. 새한미디어는 설립된 지 10여년 만에 세계 굴지의 기업이 됐다. 기록 매체인 자기테이프, 필름 등이 주 생산품이었고 1980년대 초반에는 연간 매출액이 2000억~3000억원대에 이를 정도의 대기업이었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별세했다. 제일합섬은 주식 상속 등의 형태로 삼성에서 떼내어져 이창희 회장의 새한그룹으로 넘어오는 계기였다. 새한전자, 새한종합개발 등이 세워져 새한이 그룹 형태의 외양을 갖추게 된 것도 이 시기 전후였다.
■1990년대
새한은 기존의 사업 영역에 제일합섬까지 합쳐지며 계속 성장해 나갔다. 홈비디오 열풍에 따른 자기테이프 생산이 본궤도에 오른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재찬 씨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던 그 사건은 이창희 회장이 1991년 58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재찬 씨가 27세였던 때다.
재찬 씨의 형인 이재관 당시 새한미디어 이사는 사장으로 아버지의 공백을 메워야 했고 재찬 씨도 학업보다는 사업 쪽으로 행로를 바꿔야 하는 운명의 기다림이 있었다.
그 뒤 형제와 어머니(이창희 회장의 미망인), 전문 경영인들의 뜻에 따라 새한은 꾸려져나갔고 1992년 새한이동통신, 1997년 새한정보시스템, 새로넷방송 설립 등으로 외형 확장은 지속됐다. 제일합섬이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은 1995년이었다.
재찬 씨가 새한미디어 사장이 된 바로 그해 1997년 터진 IMF 구제금융 신청과 외환위기는 새한도 빗겨가지 않았다. 시설투자와 확장 등으로 금융비용이 계속 늘어났던 새한은 합작, 사업부 매각 등으로 비상 경영에 들어갔다. 워크아웃으로 이재관-재찬 씨 형제는 그룹의 경영권을 빼앗겼다.
■2000년대
2000년대는 재찬 씨 형제에게 시련의 연속이었다. 2002년에는 분식회계를 통해 1000억여원을 불법대출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형인 이재관 부회장이 구속됐고 유죄(집행유예형)를 선고받았다.
자연스레 이들 형제에게는 부실 기업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재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특히 재찬 씨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주로 엔터테인먼트사업 분야에서 일을 해온 것으로만 전해졌다.
일과 수입이 거의 끊긴 이 시기 그는 부인(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 선희 씨)과도 별거에 들어가 가정적으로도 불우해졌다. 이씨는 혼자 아파트(109㎡)에 월세 생활을 했고 한달에 월세로 150만원을 지급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주변 가게들에 수십만원대의 외상도 있었다.
■2010년 8월20일
20여명의 지인들과 30여명의 취재진을 뒤로 한 채 영구차에 실린 이씨의 관은 장지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삼성 쪽 경영진으로는 유석렬 삼성토탈 사장, 배호원 삼성정밀화학 사장 등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제일합섬 등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었다.
화장된 뒤 유골은 경기도 안성시의 한 선교회수련원 뒷산에 수목장으로 안치됐다. 유가족들의 찬송가를 뒤로 한 채로…. 장지에는 사촌 형제인 이미경 CJ 부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등과 발인에 참석했던 형과 유가족들이 함께 했다. 재벌가 3세였던 한 40대 남자의 마지막을 함께 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