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1일, 보험업계가 술렁거렸다. 생명보험 업계 하위권인 녹십자생명이 재계 2위의 대마(大馬) 현대차그룹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녹십자생명 노조는 즉각 환영 입장을 표명했다. 지난 24일 노동조합 게시판에 공개한 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 재계 2위의 현대자동차그룹으로의 새 출발은 동종업계의 관심과 긴장 그리고 견제 속에서 업계의 판도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도약과 발전이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났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에 인수된 녹십자생명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대체로 야박하다. 아무리 현대차그룹이라고 해도 녹십자생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시장점유율 1%'의 작은 회사인 녹십자생명이 과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선두업체로 뛰어오를 수 있을까.
 
 

◆녹십자생명, '고속주행' 가능할까?
 
"현대차그룹의 녹십자생명 인수는 보험업계 선두업체로 만든다는 것보다는 그룹 내 금융 포트폴리오 완성의 측면이 크다."
 
업계는 현대차그룹의 녹십자생명 인수에 대해 그룹 내 금융계열사의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장기적인 현금 흐름을 확보하고 계열사의 시너지효과를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한다. 현대차그룹은 실제 이번 인수로 인해 현대카드·현대캐피탈·현대커머셜과 HMC투자증권에 이어 보험사까지 거느리게 돼 은행을 제외한 금융 부문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게 됐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0월21일 녹십자홀딩스가 보유하고 있는 녹십자생명 지분 89.4%(1756만주)를 2283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외부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현대차그룹의 녹십자생명 인수는 자금조달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현대모비스나 기아차와 녹십자생명 간에는 직접적 사업시너지도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우증권 또한 인수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험업계 역시 녹십자생명의 입지변화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이다. 견고한 '빅3' 중심의 생보업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한 대형 생보사 관계자는 "(녹십자생명의 향후 입지 변화에 대해) 관심 사항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업계 주도권을 쥔 대형 생보사에 긴장감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다른 생보사 관계자 역시 "녹십자보다는 현대차그룹이 탄탄하니까 투자를 더 잘하겠지만, 보험산업이 돈을 쏟아 붓는다고 단기간에 확 크는 것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설계사 한명을 데려오는 게 굉장히 어렵고 방카슈랑스 등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어 보험사 순위는 쉽게 바뀌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인수한 녹십자생명이 성장을 꾀한다면 개인보험 부문이 아닌 퇴직연금 등 단체보험 부문이 될 것"이라며 "그러나 이미 현대차그룹이 HMC증권에 퇴직연금을 많이 맡긴 상황이어서 녹십자생명은 큰 경쟁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녹십자생명은 녹십자그룹이 지난 2003년 7월 대신생명을 인수해 설립한 회사로 총자산 3조원 수준이다. 지난해 말 기준 23개 생보 중 자산순위 17위에 머물고 있다. 올 6월21일 공시한 녹십자생명보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녹십자생명은 지난해 1조362억원의 영업수익을 올렸으며, 78억원의 영업이익과 53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자동차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현대차그룹이 얼마 이익이 날지 모르는 조그만 보험사 인수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의도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생보업계 진출 배경을 둘러싼 '속내'에 의구심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딸을 위한 재산분배' '사위 챙기기'가 아니냐는 시각이 내비치기도 한다. 지배주주가 될 현대커머셜의 최대 주주는 5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차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의 둘째딸인 정명이 고문과 남편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이 각각 33.33%와 16.6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이 같은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 또 정 사장은 이번 녹십자생명 인수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녹십자생명의 새 CEO 후보로도 정태영 사장이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정 사장은 2001년 업계 7위인 다이너스카드를 인수해 업계 2위권의 현대카드로 일궈낸 공로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정 사장은 현대카드뿐 아니라 캐피탈·커머셜 대표도 맡고 있는 등 HMC증권을 제외한 현대차그룹의 금융 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녹십자생명은 차 산업과는 시너지를 내기 어렵지만 현대카드·캐피탈·커미셜 등 금융업체들과는 활발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어 이러한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새 사명 후보 1순위로는 'HMC생명보험'이 거론되고 있다. 과거 현대생명이라는 사명이 있었지만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된 뒤 2002년에 대한생명에 매각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는 후보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대주주 적격성 심의를 거쳐 내년 초 녹십자생명을 정식으로 인수해 공식 출범을 선언할 계획이다.
 
◆ 보험업계의 인수합병(M&A) 물꼬 트나
 
현대차의 녹십자생명 인수를 계기로 보험업계의 인수합병(M&A) 움직임도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3월 농협의 경제부문과 신용부문 분리로 생보업계 4위의 농협생명이 출범하고,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의 생보업계 진출에 따라 국내 생보업계에 변화의 움직임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현재 M&A시장에서는 에르고다음다이렉트와 동양생명·ING생명·그린손보 등이 매물로 거론되고 있다. 교보생명도 지분매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KB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 등 대형 금융지주사들이 이러한 인수에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진원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대형 금융지주사들이 생보사를 보유하고 있으나 대형 금융지주 규모 대비 생보업계 내 지위는 대형3사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적 성장 이외에 지분 인수 등의 방식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본다"며 "다만 지분 보유자의 매각의지는 구체화되지 않아 단시일 내 생보사 M&A 이벤트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