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어도, 바람은 꽤 찼다. 서울역 광장과 도로의 경계에 퀸 사이즈 침대만한 장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누에고치 모양으로 뭉쳐진 이불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들, 그들 앞에서 뒹구는 소주병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바쁜 발걸음으로 그 모습을 지나쳤다. 마치 그 곳에 아무 존재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한국의 대도시에서 노숙인은 유령 같은 존재다. 국내에 살고 있지만 국민이 아니다. 거주지에 주민등록이 등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이 아니니 사회보장을 받을 수 없다. 생산이나 거래를 하지 않으니 경제주체도 아니다. 기업도, 정부도 이들을 보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사회, 경제적으론 유령과 마찬가지다.
서울형 사회적기업인 빅이슈코리아는 '유령'을 '국민'으로 만든다. 노숙인이 빅이슈 판매원(이하 빅판)이 되면 거주지 즉 주소지를 준다. 처음 6개월 동안은 고시원이나 쪽방 거주를, 그 후엔 임대주택 입주를 지원한다. 주소지가 생기면 노숙인은 더 이상 '유령'이 아니다. 그저 집이 없는 '국민'이 된다. 사회보장의 대상이 된다.
달라지는 건 또 있다. 그날은 햇살이 따가웠다. 광화문우체국 건너편이었다. 빨간 조끼를 입고 ID카드를 목에 건 중년남자가 빅이슈 잡지를 판촉하고 있었다. 표지모델은 배우 김승우. 지나가던 한 젊은 여성이 "아저씨, 오랜만이죠" 라며 먼저 인사를 건넨다. 중년남자의 얼굴이 하회탈처럼 밝아졌다.
노숙인이 인사를 건넸다면 움찔 놀랐을지도 모를 젊은 여성들이 빅판에게는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선다. 영양제나 음료는 건네는 이도 있다. 단골 빅판을 두고 매주 잡지를 사가기도 한다.
빅이슈 한권을 팔리면 빅판한테는 가격의 절반이 수입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때 오가는 건 건 돈만이 아니다. 가치와 관심이 오간다. 가치는 자부심을 준다. 관심은 위로를 준다. 노숙인도 거리에 있고, 빅판도 거리에 있지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서 있다.
서울 이화여대 앞 빅판 홍삼용 씨(65)는 최근 소형 트럭 한 대를 장만했다. 1년 반전에만 해도 그는 누구도 챙겨주는 이 없는 익명의 노숙인이었다. 1998년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생업이던 마늘장사를 접었다. 자살시도만 세 차례. 생명은 질겼다. 서울역과 노숙인 쉼터를 떠돌았다. 그러던 그가 빅판 50여 명 중 최초로 자립에 성공한 것이다.
홍 씨는 내년부터 식당 식자재 납품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는 얼마 전 이대의 '단골손님'들에게 A4지에 인쇄한 감사편지를 돌렸다. 편지에는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제가 하루빨리 성공해 사업왕이 되어 이화여대 학생들이 저를 도와준 것과 같이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씌어 있었다.
“제 인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는 천사의 마음을 가진 이화여대 학생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먹을 것, 비타민, 영양제 등을, 겨울에는 추위를 많이 타는 저의 허약함을 알고 따뜻한 겨울 내복과 핫팩을 대주시고 추위를 견디게 해주시고 낱낱이 챙겨주셨던 학생들의 정성에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지난 8월 22일, 코레일은 "노숙인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노숙인의 서울역사 야간출입을 막았다. 서울시는 쪽방 등 임시주거비 지원, 응급대피소 운영 등 노숙인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서울역사 안에 머무는 노숙인 100명의 실태를 조사했다. 이들이 공공 역사에 머무는 이유가 뜻밖이었다. 응답자 47%가 '사람들이 있어서 혼자 있기 보다는 안전하니까'라고 답했다.
경제 위기 속에 노숙인이 2만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노숙인한테 필요한 건 단지 잠 잘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 그래서 혼자 있는 것보다 안전한 곳, 유령 같은 존재를 사람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곳, 사람의 생태계다. 그게 사회다.
유령을 사람으로 되돌리는 생태계
에코라이프
이경숙 이로운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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