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가시고 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는 처서(處暑)가 지났지만 여름 대표 과일인 수박의 인기가 여전히 뜨겁다. 연일 낮 기온 30℃를 넘나드는 폭염이 지속되고 있는 게 원인이다. 여름이 길어지면서 수박장수들의 표정이 밝지만, 정작 가을 인기 과일인 포도와 복숭아 장수의 얼굴은 어둡다. 봄철 때 아닌 냉해와 지속되는 폭염으로 포도의 착색이 불량하고 당도가 낮아져서다. 복숭아도 봄 한파로 많은 물량이 동사한데다 폭우로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해 내놓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면서 실종된 봄과 가을에 ‘울고 웃는’ 마트의 과일코너 풍경이다.
지구온난화 영향에 따른 ‘가을 실종’으로 업종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길어진 여름에 함박웃음을 짓는 시장이 있는가 하면 매년 다가오는 가을 특수를 노린 업종은 연일 울상이다. 인기 행진을 틈타 휴가까지 미뤄가며 영업 중인 곳은 좋겠지만 적자라도 면해보려고 ‘땡처리’라는 고육지책을 꺼내야만 하는 업종은 숨통이 막혀가는 상황이다.
◆얼씨구나 ‘제습기’
여름 인기 품목으로 알려진 제습기시장이 때 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점차 가을이 짧아지고 우리나라 기후가 고온 다습한 아열대성 기후에 가까워진 덕분이다. 특히 올해 장마가 기상 관측 이래 최장기록인 50일을 넘기면서 제습기시장의 호황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제습기시장은 6~7월 장마철에 주로 판매량이 집중돼 왔다.
이에 위닉스, LG전자 등 주요 제습기업체들은 여름휴가도 미룬 채 물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길어진 여름에 장마마저 오래 지속되면서 제습기 수요가 폭등한 것. 2009년만 해도 5만대에 불과했던 국내 제습기시장 판매 규모가 지난해에는 약 50만대로 껑충 뛰어오르더니 올해는 100만~140만대까지 팔릴 것으로 전망된다.
위니아 관계자는 “성수기를 지나면 수요가 꺾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직까지도 수요가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다”며 “올해는 여름휴가까지 미뤄서 떠났을 정도로 추가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LG전자 관계자도 “대부분의 기업들이 7월말에서 8월초 사이에 여름휴가를 가지만 창원공장 제습기 생산라인은 8월말에서 9월초에 모두 휴가를 다녀왔다”고 말했다.
물론 제습기의 강세가 전적으로 가을 실종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내에서 빨래를 건조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는 것도 제습기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을 실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같은 기후변화 추세와 더불어 소비 트렌드까지 변하면서 제습기는 계절가전 의미를 탈피하고 있다.
◆사라진 ‘가을 침구’
제습기가 9월 들어서도 특수를 이어가는 반면 가을 침구류는 시장에 발을 내밀기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봄과 가을이 점차 줄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는 형태로 바뀌면서 시장이 대폭 축소되고 있는 것.
이마트에 따르면 올해 가을 침구 비중은 3년 전보다 20%나 감소했다. 시장 규모가 줄면서 가을 침구 업체들은 준비해둔 물량 처리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형마트들이 가을 침구류를 대폭 할인해 판매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롯데마트는 지난 8월 서울역점에서 가을 침구 대방출 행사를 열었다. 시중가 대비 최대 50%가량 저렴하게 내놓았다. 업계 전문가는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이 예전보다 정기세일을 앞당기고 있다”며 “이는 가을이 줄어들면서 계절상품을 급히 소진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규모가 줄어들자 생산 업체들은 아예 가을 침구로 인한 매출 상승을 포기하는 모양새다. 대신 사계절 사용 가능한 침구로 이동하는 수요와 방향을 맞추려 하지만 이 조차도 명쾌하진 않다.
이들 업체는 소재가 가볍고 보온력이 높은 마이크로화이버 소재 침구를 속속 내놓고 있다. 마이크로화이버 소재 침구는 지난해 매출이 51%나 성장했을 만큼 수요가 높다. 그러나 이미 침구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상태라 가을 침구류 수요 감소로 인한 공백을 메울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이마트 관계자는 “가을이 짧아지면서 계절 이불에 대한 수요가 점차 사라지고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침구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해당 업체들은 매출 성장을 위해 알레르기 케어를 비롯한 다양한 기능성을 추가한 침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육지책 꺼낸 ‘의류’
가을 실종의 직격탄을 가장 크게 맞은 업계는 뭐니뭐니해도 의류시장이다. 가을 옷의 경우 입을 수 있는 기간이 사실상 길지 않아 판매가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가벼운 여름옷을 겹쳐 입는 식으로 소비자들의 스타일이 전환되면서 단품 중심의 가을 아이템이 주춤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트렌치코트를 들 수 있다. 옥션에 따르면 지난해 트렌치코트 매출은 2008년 대비 15%나 줄었다.
가을 실종으로 인한 후폭풍을 정통으로 맞고 있지만 정작 의류업계는 이렇다 할 대응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 시장이 주류가 되면서 업체들은 겨울 코트나 점퍼 등의 고가 아이템에 주력하는 양상이 짙어졌다. 자연스레 다른 분야의 매출 촉진 전략은 전무한 상황.
특히 가을 실종 여파는 여성복 부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재킷 등 가벼운 외투나 수트 판매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마땅한 대안은 아직 없다. 의류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강점은 사계절이 있다는 것”이라며 “일정하게 바뀌는 계절에 맞춰져 있었는데 갑자기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궁여지책으로 여성복 업체들은 올해 가을 상품을 예년보다 일찍 내놓고 있다. 특히 올해 추석 연휴가 9월 중순으로 빨라지면서 가을 시즌 판매 기간이 예년에 비해 더 짧아질 것으로 예상돼 백화점 여성복의 경우 이미 8월 초부터 상당수 브랜드들이 가을 상품을 내놓았다.
베네통과 시슬리 등 브랜드들은 니트와 리넨 등 소재감을 다채롭게 사용한 가을 상품을 예년에 비해 이른 8월 초부터 출시했다. 나인씩스뉴욕, 커밍스텝, 보브 등도 카디건과 긴 소매 셔츠 및 블라우스, 니트 등 가을 상품을 대거 선보였다. 변형 트렌치코트 등 본격적인 아우터 아이템을 출시하는 곳들도 늘었다.
가을 상품을 '땡처리'에 가까운 가격으로 방출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추석마저 앞당겨지면서 물량 소진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관측된다.
마리오아울렛에 입점해 있는 여성 영캐주얼 브랜드 올리브데올리브, 리스트 등은 지난 8월 말부터 재킷, 트렌치코트, 원피스 등 가을 상품을 최대 80% 할인 판매하기 시작했다.
◆희비 엇갈리는 ‘주류’
‘봄 막걸리, 여름 맥주, 가을 막걸리, 겨울 소주’라는 주류시장의 공식도 가을이 짧아지면서 점차 파괴되고 있다. 가을 실종으로 맥주의 인기는 길어졌지만 상대적으로 막걸리의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이 때문에 '주류시장에서의 정설은 이제 옛이야기’라는 말도 나온다.
7~8월이 대목이던 맥주시장만 해도 올 들어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무더위가 이어지면서 '맥주 성수기'가 전년보다 2배나 길어졌다. 반면 길어진 더위 탓에 막걸리업계는 울상이다.
일반적으로 가을은 야외활동 인구가 늘고 체육대회나 각종 지역 축제가 열린다. 때문에 막걸리의 계절로 불린다. 하지만 가을 실종으로 막걸리업계의 특수가 사라지고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파전과 막걸리를 마시는 풍속은 더 이상 보기 힘들다”며 “길어진 장마로 막걸리를 찾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마시는 걸 즐기는 사람들도 예전엔 많았는데 이마저도 거의 없어졌다”며 “가을이 사라지면서 주류 풍속이 또 어떻게 변할지 감조차 잡기 힘들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