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예로부터 한가위는 가을 수확기를 맞아 풍년을 축하하고 조상의 덕을 추모하는 때로 가장 중요한 명절로 여겨졌다. 배고팠던 그 시절, 햇곡식으로 배를 채우고 이웃끼리 정을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예년보다 열흘 정도 일찍 찾아온 '여름 추석'에 풍성한 가을들판의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더욱이 경제난의 여파가 한가위의 여유로운 정취마저 삼키는 모양새다. 조상을 기리는 차례상이 간소해지고, 추석 선물마저 거품을 뺀 '저가형'이 대세를 이룬다.
◆ 풍성한 '차례상' 실종
조상① : "이번 제사는 여행지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갔더니, 전부 플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조상② :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야.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 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근데 먼저 카페에 회원 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에이, 흥할 놈들!"
인터넷에 떠도는 차례상에 관한 유머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사라져가는 조상에 대한 효(孝) 정신과 차례상 차리기가 부담스러운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도 올 추석, 풍성한 차례상을 접하기는 힘들 모양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모노리서치가 지난 8월27일 전국 성인남녀 1070명을 대상으로 올 추석 차례상 예산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준비하거나 적게 지출하겠다(73.7%)'고 답했다. 아예 '차례상을 차리지 않겠다'는 응답도 7.6%나 나왔다.
이 조사를 진행한 모노리서치의 이태우 연구원은 "지난해와 비슷한 지출을 유지하거나 적게 지출하겠다는 응답이 다수인 것은 최근 경제난의 여파가 반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이처럼 예산은 줄었는데, 올해는 유난스러운 이상기온으로 과일 작황마저 나빠 추석 차례상 차리는 것이 더 부담스럽게 됐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월28일 기준으로 사과와 배를 5개씩 준비하는 데 필요한 평균 비용은 3만5190원으로 지난해 3만760원보다 14.4% 올랐다.
전반적으로는 차례상 비용이 전년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추석이 다가올수록 햇과일류의 오름세는 가팔라질 것으로 우려된다. 태풍 소식마저 들려오고 있어 차례상을 준비해야 하는 주부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주부 박수진(가명·서울 상계동)씨는 "올 추석에는 경기가 어려워 명절 보너스도 기대하기 어려운데 제수용품 비용까지 오르고 있어 걱정이 많다"며 "올 추석은 풍성한 가을의 수확이 떠오르지 않는 우울한 명절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얇은 지갑에 '9900원 선물 불티', 주부들은 알바 전선으로
장기간 경기 침체로 추석 선물도 바짝 쪼그라들었다. 고품격 선물보다는 저가형 선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른바 9900원 전성시대, 1만원 이하 저가선물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오픈마켓 옥션이 지난 8월26일 추석을 앞두고 내놓은 9900원짜리 추석선물세트가 하루 만에 1만개 전량이 매진됐다. 지경민 옥션 온사이트마케팅팀 부장은 “추석을 앞두고 1만~2만원대 저가 선물세트 대량주문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물량을 대폭 늘리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온라인쇼핑몰과 대형마트의 상황도 비슷하다. 오픈마켓 11번가가 이번 추석시즌 기획전에 등장한 상품을 분석한 결과 1만원 이하 상품의 비중이 40%가 넘었다.
이마트가 지난 8월19~25일 추석 선물세트 예약판매 실적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초저가 상품의 큰 인기가 돋보인다. 전체 매출은 작년 추석 선물세트 예약 당시보다 약 2배 가까이 늘어난 반면, 1만원 이하 선물의 주문은 4배 이상 급증했다.
덕분에 매년 추석특수를 누려왔던 업체들도 주력 상품을 바꾸고 있다. 속옷업체들은 대표적인 명절 선물인 내복 대신 양말 판매에 공을 들이고 있다. 더운 날씨 탓에 내복 판매가 주춤하고, 대신 경기불황과 맞물려 양말 같은 저렴한 선물을 찾는 고객이 많아져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고가 선물 위주의 백화점보다 할인점 등이 이번 명절 특수를 누릴 것이라고 유통업계는 보고 있다.
한편 '얇은 주머니' 탓에 추석을 맞은 주부들은 더 바빠졌다. 가정 살림하랴 명절 준비하랴 바쁜데 구직 전쟁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빠듯한 경제상황 속에서 추석을 맞게 된 주부들이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 구인구직 포털 알바몬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35세 이상 구직자를 중심으로 중장년 이상 알바 구직자의 이력서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대 구직자의 신규이력서는 가을 개강을 맞아 감소한 반면, 35세 이상 구직자의 이력서가 급증하는 추세다. 구체적으로 35세 이상 구직자의 신규 이력서 수 현황을 살펴보면 7월 4주차엔 661건에 그치던 이력서 수가 8월 4주차엔 874건으로 약 32% 이상이 증가했다. 특히 35세 이상 남성이 약 10% 가량의 증가율을 보인 데 비해, 35세 이상 여성의 신규 이력서 수는 무려 45%의 증가율을 보였다.
알바몬 관계자는 "추석 물가 부담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가정 경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중장년층 특히 주부들이 단기 아르바이트를 통해 부담을 줄이려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