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자식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그들이라면 최소한 아버지가 이뤄놓은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소련보다 우수하다. 특히 우리 아이들은 문화대혁명을 거친 만큼 고초를 이겨 낸 경험도 있다."
중국 혁명 원로 천윈(陳雲) 전 부총리의 말이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이 태자당(太子黨)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배경이 천윈의 발언에 담겨 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만 학생·시민들의 시위로 1949년 성립된 공산당 집권 체제가 흔들리자 고립된 중국 지도부는 자신들의 친인척으로 눈을 돌렸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홍색귀족'(紅色貴族)이라고도 불리는 태자당이 중국을 안정시키기는커녕 뿌리째 흔들고 있다. 전통적으로 '관시'(關係)를 중시하는 중국 사회에서 혈연관계로 얽힌 고위층 자제들이 정·관·재계 곳곳을 장악하고 각종 부정비리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낯 드러난 홍색귀족 실태
중국의 강력한 언론통제 등으로 좀처럼 드러나지 않던 이들의 민낯이 생각지 않은 곳에서 터졌다. 지난해부터 세계 각국 지도층이 조세회피처에 숨긴 '검은돈' 실태를 심층 보도해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레이다 망에 중국 홍색귀족들이 걸려든 것이다.
ICIJ의 '중국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미국, 중국,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기자들이 홍콩에 모였고, 이후 6개월간 중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극비리에 공조 취재를 진행했다. 이들은 페이퍼컴퍼니(서류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 설립을 대행해주는 '포트컬리스 트러스트넷'과 '커먼웰스트러스트'라는 회사에서 확보한 기밀 파일을 분석해 중국·홍콩·대만에 주소를 둔 3만8000명의 실체를 파헤쳤다.
그 결과 '홍색귀족' 13명의 유령회사 설립 실태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포함한 5명의 전·현직 공산당 상무위원 친인척이 해외에 유령회사를 세운 사실이 확인됐다. 시 주석의 매형 덩자구이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엑설런스 에포트 프로퍼티’라는 회사를 세워 지분 50%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개발업자로 3억 달러(3200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희토류 개발업체 지분을 소유한 덩은 시 주석 큰누나 치차오차오(齊橋橋·모친을 따라 성을 바꿈)의 남편이다.
◆시진핑·원자바오 등 최고위층 가족 포함
2012년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일가 재산이 27억달러(2조8800억원)라고 폭로해 '서민 총리' 이미지가 구겨진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아들 원윈쑹과 사위 류춘항도 버진아일랜드에 유령회사를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위성통신그룹 회장인 원윈쑹은 부친의 총리 재직시절 각종 사모펀드를 만들어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원 전 총리는 최근 언론에 결백을 주장하는 서한을 보내는 등 명예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종전 이미지를 되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리펑(李鵬) 전 총리의 딸 리샤오린, 덩샤오핑(鄧小平) 사위 우젠창(吳建常), 8대 혁명원로 펑전(彭眞) 아들 푸량, 예젠잉(葉劍英) 전 국가부주석 조카 예쉬안지(葉選基) 등도 회사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났다.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것, 그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ICIJ도 홍색귀족들의 유령회사 설립 사실만 밝혀냈을 뿐 이들 회사가 이후에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ICIJ는 유령회사가 불법행위와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미국의 금융감시 단체인 글로벌 파이낸셜 인테그리티(GFI)는 중국 기업들이 조세회피처에 자회사를 세우고 이 자회사에 상품을 싸게 수출한 뒤 다시 비싸게 본국으로 수입하는 방식으로 검은 돈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금은 조세회피처에 개설된 계좌에 예치되거나 외국인 자금으로 세탁돼 중국으로 다시 유입, 부동산 등 투기시장으로 흘러들어 갔다.
◆최대 4兆달러 중국에서 빠져나가
중국 경제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영기업도 이 같은 방식의 자금세탁에 합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ICIJ는 1월23일 발표된 2차 폭로를 통해 푸청위 중국석유화학집단공사(시노펙·SINOPEC) 회장 등 3대 국영석유기업 전·현직 임원 20명이 버진아일랜드 등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자금세탁과 공금횡령에 활용했다고 밝혔다. '석유방'(石油幇)으로 불리는 이들 3대 국영석유기업 출신의 권력집단은 석유 유통을 통해 형성한 막대한 이권을 바탕으로 당 상층부에 진입해 태자당과 함께 중국 정치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ICIJ는 2000년 이후 이런 방식으로 해외로 유출된 중국 자산이 최대 4조달러(약 4270조원)라는 천문학적인 수준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클라크 개스코인 GFI 대변인은 "중국은 러시아와 멕시코를 제치고 세계에서 불법 자금 유출이 가장 많은 나라"라면서 "ICIJ의 이번 폭로 내용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1월22일 이뤄진 ICIJ의 폭로는 중국 지도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특히 집권 이후 강력한 정풍운동으로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시진핑 주석의 친인척까지 포함돼 메가톤급 충격을 안겨줬다.
◆시진핑 '반부패 드라이브' 제동 걸리나
시 주석은 최근 "독을 치료하기 위해 뼈를 깎아내고, (독사에 물린) 손목을 잘라내는 무인의 용기로 반부패 투쟁을 끝까지 진행하겠다"고 천명하는 등 반(反)부패 투쟁을 강화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장·차관급 인사를 포함해 18만명이 넘는 부패 공직자를 처벌하는 등 유례없는 반부패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그런 만큼 ICIJ 보고서에 포함된 시 주석 친인척 관련 내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시 주석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상황으로 내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빈부격차가 격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대 4조달러에 달하는 검은자금 스캔들에 지도층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연루돼 있다는 사실이 중국 국민들에게 알려질 경우 광범위한 민심이반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철저히 ICIJ의 폭로를 차단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중국 언론들이 일제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ICIJ 사이트는 물론 주요 외신 접속이 차단됐다. 또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 를 비롯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비판 글이 올라올 때마다 삭제되는 등 엄격한 보도통제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서방은 물론 전세계 주요 매체들의 보도를 차단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중국 지도부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에 대응할지가 주목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1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