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두명이 있다. 공범 혐의가 있는 죄수들은 각각 분리돼 조사를 받는다. 죄를 먼저 자백한 사람은 낮은 형을 부과 받는다.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가중처벌이 예고된다. 이 죄수는 심리적 교착상태에 빠져 자백을 선택한다. ‘죄수의 딜레마’ 이론으로 리니언시 도입의 배경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홈플러스,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의 가격 담합실태를 정조준했다. 명절 선물세트의 가격을 일제히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했다는 의혹을 짚은 것. 이후 홈플러스가 리니언시를 신청하면서 가격 담합행위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다른 대형마트들은 담합행위를 부인하는 상황이다.
◆담합 자진신고한 홈플러스
공정위가 대형마트들의 명절 선물세트 가격 담합 정황 수집에 나서자 가장 먼저 홈플러스가 담합 가담을 실토했다. 홈플러스는 최근 가격 담합행위를 인정하고 1순위로 리니언시를 신청했다. 리니언시가 받아들여지면 담합행위로 인한 과징금 감면이나 면제 혜택을 받게 된다. 홈플러스는 이 같은 혜택을 누리기 위해 대형마트들 중 가장 먼저 담합행위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2009년 LG생활건강과 애경산업,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 등 생활용품업체는 치약 할인 폭을 기준가격의 30% 이내로 제한하고 덤이나 판촉물을 제공하지 않기로 하는 등 가격 담합사실이 들통 난 바 있다. 당시 애경산업과 태평양에게는 각각 7억3100만원, 5억9100만원의 과징금 철퇴가 떨어졌다.

하지만 1순위로 담합행위를 자진신고한 LG생활건강은 과징금 전액을 감면받고 고발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태평양도 과징금을 50% 감면받았다. 애경산업은 태평양보다 5개월가량 빨리 자진신고를 했지만 제출한 자료가 추가적인 증거력이 없다는 이유로 감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같은 선례에 비춰볼 때 홈플러스의 리니언시 신청이 받아들여질지가 주목 받고 있다. 리니언시 혜택을 받으려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 또 추가적인 증거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2009년 애경산업이 자진신고를 했음에도 혜택을 받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홈플러스가 어느 정도의 정보와 추가적인 증거력을 제시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이마트·롯데마트는 완강히 부인

이마트와 롯데마트는 가격 담합행위를 인정한 홈플러스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선물세트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대형마트가 굳이 상품 가격을 짜 맞출 이유가 없다며 담합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이마트 관계자는 “70% 이상이 단독 상품이기 때문에 다른 대형마트들과 가격 담합을 할 필요성이 없다”며 “경쟁사 상품이 겹치는 상황이 아닌데도 가격 담합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다른 대형마트들과 하루 단위로 늘 경쟁하기 때문에 가격을 최대한 낮춰서 선보이고 있다”며 “특히 명절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가격 담합이 나올 수 없는 구조”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담합행위를 부인하는 대형마트들은 가격 담합행위를 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홈플러스가 자진신고를 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다른 대형마트들의 담합행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는 두개 기업의 담합행위가 인정될 경우 2순위로 자진신고한 기업에 대해서는 감면 혜택을 주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다른 대형마트들에 대한 가격 담합행위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현재 자진신고한 홈플러스도 리니언시를 통한 혜택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며 “홈플러스가 리니언시를 신청한 이유를 잘 살펴보면 대형마트들도 담합행위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했다. 또 이 관계자는 “확실한 것은 1순위로 리니언시를 신청한 홈플러스가 쥐고 있다”며 “공정위가 홈플러스의 리니언시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검토하는 자료들을 통해 모든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니언시, 어떤 역할 할까

리니언시는 가격 담합행위의 증거 확보가 어렵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한다. 담합은 일반적으로 기업 내부에서 은밀하게 진행된다. 내부 고발자나 기업 스스로 고백하지 않으면 명백한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식이다. 자진신고를 유도해 제재를 일부 완화해주면서 다른 기업들의 담합 사실을 확인하는 것. 실제로 공정위는 최근 수년간 이 제도를 활용해 굵직한 담합 사실을 적발했다. 최근 몇년간 발표된 라면회사의 가격 담합, 생명보험사의 개인보험 이율 담합, 가전회사의 LCD 담합, 은행의 CD금리 담합 등이 리니언시의 공로다. 이 제도가 담합 사례 적발에 효과적으로 작용하자 더 확장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물론 리니언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담합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낸 기업이 가장 먼저 자진신고를 할 경우 과징금 감면 혜택은 물론 면죄부까지 받게 되는 한계가 있어서다. 더구나 일부 대기업들은 이 제도를 악용해 과징금을 면제 받거나 상습적으로 담합을 반복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홈플러스의 리니언시 신청이 판도라의 상자일지, 자폭 상자일지에 업계가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리니언시는

리니언시는 증거 확보가 어려운 담합조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978년 미국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 제도는 담합행위에 대한 적발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관련 기업이 상대 기업을 신고하는 카드로도 쓰인다. 때문에 담합행위의 시도를 막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활용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리니언시를 처음 도입했다. 당시 75%였던 과징금 감면율이 2005년 100%로 확대된 후 담합 사실을 처음 신고한 기업에게는 과징금 100%를, 두번째로 신고한 기업에게는 50%를 면제해 주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2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