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동대문 남평화시장 3.3㎡(1평) 매장에 ‘형지물산’이라는 입간판이 내걸렸다. 형지물산은 ‘비버리힐스 폴로클럽’ 여성복 라이선스를 따와 소위 대박을 친 곳. 당시 램스울 소재의 컬러 스웨터는 주부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브랜드 성공에 힘입어 형지물산은 2년 뒤 ‘크로커다일레이디’를 론칭, ‘중장년 여성 캐주얼’이란 새 블루오션을 창출했다. 이후에도 ‘샤트렌’, ‘올리비아하슬러’ 등 신규 브랜드를 잇따라 내놓으며 여성패션 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패션그룹형지를 이끄는 최병오 회장의 성장스토리다.

#. 2012년. 잘 나가던 형지는 돌연 전략을 수정했다. 전국 매장수가 1500개에 달하고 연매출이 7000억원 규모로 불어나자 내부 성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 최 회장은 외부 M&A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남성 와이셔츠브랜드 ‘예작’ 등을 보유한 우성I&C 인수를 시작으로 아웃도어, 골프웨어 시장에까지 손을 뻗었다. 바우하우스를 사들이며 유통업에도 뛰어들었다. 몸집이 커진 기쁨도 잠시. 수익성은 외형 성장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최 회장의 공격적인 M&A는 종합패션업체로 거듭나는 신호탄이자, 뼈아픈 성장통의 시작이었다.


최병오 형지 회장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공격적인 M&A와 내부 브랜드를 확장하며 새먹거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아서다. 무리해서 사들인 회사들은 ‘자금난’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고, 형지가 내놓은 신사업 역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며 답보 상태다. 최 회장에게 닥친 호된 성장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 성장통 하나 - M&A로 텅텅 빈 곳간

우선 예전만큼 실탄(현금)이 비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최 회장의 곳간을 줄줄 새게 만든 것은 그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M&A 사업. 최 회장은 ‘3년 내 덩치를 3배 이상 키운다’는 목표 아래 최근 2년간 우성I&C, 에리트베이직(학생복)을 비롯해 종합쇼핑몰인 바우하우스(유통), 에모다(패션), 베트남C&M공장(의류제조) 등 5개 법인을 잇따라 사들였다.


최 회장은 M&A 때마다 빚을 내 목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빚이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업계에 따르면 2009년 116억원이던 형지의 순차입금(총차입금-현금성자산)은 지난해 2199억원으로 늘었다. 4년 만에 19배나 커진 셈이다. 올 상반기 재고 털기에 나서면서 270억원 안팎의 빚을 갚았지만 부담을 줄이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특히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1312억원)과 유동성장기부채(200억원)가 전체 빚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코앞에 닥친 부담이 커졌다. 이자부담 역시 마찬가지. 지난 2012년 38억원에서 지난해 74억원으로 두배가량 늘어났다.

자금사정이 나빠지자 최 회장(지분 100%보유)은 매년 지급받던 배당금도 지난해에는 받지 못했다. 이렇다보니 시장 일각에서는 ‘형지가 자신들이 놓은 무리한 M&A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았다.
 
형지 측은 “결코 위기가 아니다”고 항변하지만 최 회장이 올해 목표를 ‘안정적 재무구조 확보’로 정한 것도 이러한 업계 우려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한국신용평가 관계자는 “M&A는 사업을 확장하는 빠른 외형성장과 더불어 해외시장 진출 등 지역다각화를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로 부각되고 있지만, 형지처럼 재무여력 대비 과도한 추진은 이에 따른 자금부담과 리스크를 동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M&A는 오히려 재무부담을 통제할 수 있는 대기업에 유효한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 성장통 둘 - 정체 상태에 빠진 신사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사업도 난항이다. 형지는 아웃도어브랜드인 ‘노스케이프’와 ‘와일드로즈’를 내놓았지만, 국내 아웃도어시장은 이미 전문화된 빅브랜드업체 위주로 독점적 경쟁구도가 형성돼 있어 그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다.

바우하우스를 통해 새롭게 진출한 유통업 역시 신세계, 롯데, 현대, 이랜드 등 ‘유통공룡’의 영향력이 지대해 후발주자로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바우하우스를 통해 롯데나 이랜드와 차별화 된 ‘틈새 공략’을 내걸었지만 차별화 포인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의문”이라며 “중저가 형지브랜드 위주로 모아놓은 느낌인데, 이를 통해 장안동(바우하우스 소재지)까지 얼마나 고객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꼬집었다.

유니클로, 자라, H&M 등 빅3 SPA브랜드들이 형지가 장악하던 ‘중저가 옷시장’을 위협하고 있는 점도 최 회장에겐 부담요인이다.

◆ 성장통 셋 - 밀리고 밀리는 해외시장

본격화된 아시아시장 진출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형지는 지난 5월 중국 쑤저우에 있는 태화백화점에 남성복브랜드 ‘본’ 1호점을 오픈한 데 이어 이번 달에는 중국 상하이 신세계백화점, 대환백화점, 소주 지우광백화점 등에도 매장을 개설할 계획이다.

지난해 대만에 진출한 여성 캐주얼브랜드 샤트렌은 연내 10개 매장 오픈이 목표다. 내수시장 한계 극복을 위한 최 회장 전략 중 하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비교적 빠른 진출로 유통망을 조기에 확충한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국내기업의 해외시장 진출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아시아 시장이 기회의 땅인 것은 맞지만, 재무 부담까지 안고 있는 형지에겐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해 1조원대 연매출을 일궈낸 동대문 신화의 주인공. 세상만사가 그렇듯 최 회장의 빠른 변화와 성장 이면에는 진통이 뒤따르고 있다. 이를 극복하고 최 회장은 과연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형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프로필
▲1953년 부산 출생▲1972년 페인트 대리점 운영 ▲1982년 동대문 의류업체 운영 ▲1994년 형지물산 설립 ▲1998년 형지어패럴 설립 ▲2009년 패션그룹형지 회장(現) ▲2011년 한국의류산업협회장(現) ▲2013년 대한상공회의소 중견기업위원회 위원장(現)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4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