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는 거대한 규모에 비해 친근한 얼굴을 가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고 종종 원당의 서삼릉과 헷갈리는 파주 삼릉이 있다. 알수록 기가 막힌 사연을 가진 곳, 크게 알려지지 않아 더 보석 같은 여행지, 파주로 떠난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아, 이게 바로 쌍미륵불이구나!” 용미 1리쪽으로 고개를 드니 야트막한 산에 석불이 힐끗 보인다. 산 중턱에 자리잡아 쉽게 눈에 띈다. 주차장에서 대웅전까지 계단을 오르고, 대웅전에서 다시 108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거대한 석불을 만난다. 흔히 쌍미륵불이라 부르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다.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었고 아래서 보면 배불뚝이 노승이 나란히 서 있는 것도 같고, 앞 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딘가로 향하는 것도 같다. 앞에 선 원립불은 가슴 앞에 연꽃을 쥐었고 뒤로 비껴선 방립불은 손을 합장하고 네모난 삿갓을 썼다. 원립불은 남상, 뒤의 방립불은 여상이라고 하는데 뒤로 선 모습이나 다소곳한 태도는 여성의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다소 늠름하게 입을 꾹 다문 표정이나 생김새는 글쎄….

한마디로 ‘지못미 캡쳐 컷’을 보는듯해 웃음이 난다. 그만큼 친근하고 해학적이어서 균형미가 완벽한 불상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보물 제 93호인 마애이불입상은 11세기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불상도 연세가 드셨는지 얼굴에 검버섯이 폈다. 무언가 알아 봤더니 이것은 한국전쟁 때 생긴 탄흔이라고 한다. 그렇지, 여기는 6.25 전쟁 접전지였던 파주지역이다. 몸 부분은 바위의 원래 모습을 살렸고 얼굴 부분을 그 위로 올린 형태여서 조금 불안해 보이는데, 이들이 전쟁에도 버텨준 것이 신기하고 고맙다.


이는 쌍미륵불이 생명탄생의 힘을 지녔기 때문인 듯하다. 고려 중기 13대 선종 때 일이다. 왕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 원신궁주 이씨를 맞아 대를 잇고자 한다. 그런데 도무지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어느 날 궁주의 꿈에 두 노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궁주가 왕에게 말했고 왕이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돌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은 이 바위로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해에 원신궁주에게서 왕자 한산후 윤이 태어났고 후에 반란을 사전에 막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인물이 된다. 이후 마애이불입상은 아이를 원하는 불자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찾는 곳이 됐다. 쌍미륵불 옆으로는 길이 있어 불상 뒤를 한번 둘러 볼 수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가 17.4m라 길이 다소 가파르지만 올라가 보면 눈이 시원해진다. 불두 너머로는 용미리 들판이 펼쳐지고 왼쪽 멀리엔 삼각산이 보인다. 


쌍미륵불에서 보이는 용미리
용암사 칠층석탑과 동자석

◆ 용암사
용암사는 쌍미륵불을 조성하며 창건된 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전란으로 소실됐고 1930년대 재창건됐다. 옛이름은 혜음사, 대승사였는데 1935년 대웅전을 재건하고 용암사로 바꿨다. 이곳은 고 이승만 대통령과도 관계가 있다. 모친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 후 그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1954년에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를 기원하며 동자상과 칠층석탑을 세웠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비롯해 함부통령, 미대사 등 각계인사가 제막식에 참석할 정도로 ‘뜨르르~’하게 세워졌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쫓겨나듯 하와이로 망명한 후 탑과 상도 시련을 겪었다. 1987년 철거돼 종무소 우측에 있다가 2009년에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삼성각 옆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륵전에는 신기한 불두가 있다. 양각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음각된 것인데 보는 위치에 따라 부처님의 시선이 따라오며 표정이 변한다. 보통 여행자들은 마애이불입상만 보고 삼성각과 미륵전을 지나치는데 한번쯤 들러 보면 사찰을 보다 친근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릉
파주 삼릉 재실

◆ 파주 삼릉
삼릉에는 조선의 한 많은 세 왕비가 잠들어 있다. 우선 공릉의 주인은 장순왕후 한씨다. 그녀는 제 8대 예종의 원비로 1460년에 책봉됐지만 1461년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17세 나이로 승하했다. 꽃다운 나이에 세자빈이 됐지만 1년 동안 좋은 날이 며칠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 낳고 앓다가 결국 생을 마쳤으니 말이다. 공릉 장순왕후의 아들인 인성대군도 특별한 기록이 없어 유년시절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순릉의 주인은 제 9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다. 12세 나이로 자을산군과 가례를 올렸고 자을산군이 1469년에 왕(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왕비가 됐지만 1474년 자녀 없이 19세로 승하했다. 장순왕후 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그녀 역시 10대에 요절했다.


이 두 왕비는 한명회의 셋째딸과 막내딸이다. 여러 드라마에서도 독특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한명회는 인생역전의 대표주자다. 궁지기였던 그는 수양대군의 책사가 돼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1등 공신이 된 후 절대권력을 휘두른다. 세조 12년에 영의정까지 오르게 되지만 그 야심은 그치지 않았다. 4명의 딸 중 첫째는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로, 둘째는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했고, 셋째와 넷째를 나란히 세자비로 입궐 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세자비는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마지막으로 영릉은 쌍릉이다. 영조의 맏아들이었던 효장세자와 효순왕후의 능이다. 효장세자는 7세(1725년)때 왕세자에 책봉되고 2년 후 가례를 올렸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났다. 효순왕후는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후 남편을 잃었고 본인은 37세까지 살다가 승하했다. 어렸을 때 궁에 들어왔지만 남편을 잃고 평생 외롭게 살았을 것이다. 영조는 세자가 승하했을 때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그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후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됐다.

왕족의 무덤은 명당을 찾아 정한 곳이기에 위치가 좋다. 여행자에게는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돼 주니 편안한 나들이에도 좋다. 나무 숲 그늘을 걸으며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이들의 영면을 기원해 본다.

[여행 정보]
●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가는 법
통일로 – 동산육교 – 신원지하차도 – 대자삼거리에서 ‘의정부, 고양동’ 방면으로 우회전 – 호국로 – 고양2교앞에서 ‘파주(광탄), 대자동’ 방면으로 좌회전 – 동헌로 – 혜음로 – 고양동삼거리에서 ‘광탄, 용미리묘지(추모의집, 추모의숲), 국군고양병원’ 방면으로 좌측방향

[대중교통]
광화문에서 703번 승차 – 용암사,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정류장에서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용암사,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검색어 ‘용암사’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1
파주삼릉: 검색어 ‘파주삼릉’(서삼릉과 파주 삼릉은 다른 곳이므로 반드시 ‘파주 삼릉’으로 검색한다.)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용암사
문의: 031-942-0265

파주 삼릉
paju.cha.go.k
문의: 031-941-3208
입장시간: (6월~8월)오전 9시 ~ 오후 6시 30분 / (9월~10월) 오전 9시 ~ 오후 6시
매표시간: 관람 마감 1시간 전
입장료: 일반(25세~64세) 1,000원, /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무료
문화해설(무료): 정기해설 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 30분, 오후 3시
14개 조선왕릉 1년 관람권: 30,000원
궁, 종묘, 왕릉(창덕궁 제외) 1년 2인 관람권: 100,000원

● 음식
소나무집: 아쉽게도 용암사 주변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고, 보광사 주변에 있는 산채비빔밥 전문점이다. 40년 손맛이라는 명성답게 13가지 나물로 만든 비빔밥의 맛과 풍미가 특별하다.
산채나물비빔밥 8,000원 / 산채나물정식 10,000원 / 손두부 12,000원
문의: 031-948-1021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보광사 소나무집

● 숙소
유일레저타운: 파주의 종합레저타운으로 수영장, 보트장, 행글라이더, 승마클럽, 식당 등의 시설을 갖췄으며 기업 연수로도 유명하다. 숙소는 연못가에 자리잡아 밤 낮으로 분위기가 좋다.
문의: 031-948-6161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83-10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