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꽉 막힌 공부쟁이가 아니었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적 감성을 가진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천재였다. 학문적 논쟁을 떠나 그 사람을 만나러 가보자. 500년 간극을 뛰어넘는 강한 아우라를 느껴보자.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 퇴계 이황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를 꼽으라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두 학자 모두 지폐의 주인공이니 모르는 국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학자의 생애나 학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말문이 막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나마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이 있어 할 말이 조금 더 있지만 퇴계는 도산서원과 천원짜리 지폐로 끝이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70년을 살았으니 당시 사람으로는 장수했다. 긴 생애에 비해 선생이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길지 않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지만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낙향을 결심했고, 1543년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했을 때 성묘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화려한 관직 생활보다 고향에서 글을 읽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니까 안동 계산서당과 도산서원이 선생의 주요 무대다. 물론 낙향 후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지만 번번이 이유를 들어 외직을 지망했다.
충청도 단양, 경기도 풍기 등으로 돌았는데 풍기 군수 때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도록 한 것이 바로 퇴계 선생이다. 지금의 소수서원은 선생의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왕의 부름을 여러 차례 고사했는데 이런 일이 20여회라 한다. 누구나 권력을 좇는 세상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가진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삶에 대한 철학, 직함을 내세우지 않아도 스스로 곧게 설 수 있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생은 창의적인 천재이기도 했다. 도산서당의 편액을 보면 ‘산’자를 실제 산의 모양으로 쓴 것이 상형문자같다. 딱딱할 것만 같은 서당 분위기에 유머와 재치가 느껴진다. 도산서원 ‘옥진각’에 가면 선생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볼 수 있다. 이곳에 성학십도가 있다. 성리학 이론을 도표로 정리한 이 10장의 그림이 통달한 천재, 창의적인 학자 퇴계 이황을 제대로 보여준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도하기 위해 만든 기계로 지금의 지구본과 비슷하다. 체조 모음책도 재미있다. 중국책을 퇴계 선생이 필사하며 직접 그린 그림이 수록됐다. 서당의 편액과 성학십도, 체조책을 보니 선생의 예술적 재능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천재의 다재다능에 은근 시샘이 난다.
◆선생이 만든 서당과 제자가 완성한 서원
어쩜 서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을까. 앞으로는 낙동강, 뒤로는 영지산과 도산에 푹 둘러싸인 도산서원은 집 구경만으로도 훌륭한 여행이다. 실제로 선생은 이 자리를 발견하고 그 기쁨을 몇편의 시로 남겼다. 이전에 선생은 집 근처 계산서당에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전국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서당은 소박하고 짜임새 있다. 규모가 크지 않고 문들이 낮고 작다.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건물 사이가 좁은 편인데 쓸데없는 동선 낭비를 줄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신 서당 앞에는 너른 마당이 있다. 이곳에서 뛰어 놀고 산책했을 학생을 상상하게 된다. 모든 방과 문에 이름을 지었는데 하나하나 성리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는 곳은 습기가 차지 않도록 누각 형태로 지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서원 구역을 완성했다. 1575년 사액을 받았는데 현판은 선조 앞에서 한석봉이 썼다. 선조는 한석봉에게 도산서원이라는 네글자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지 않고 받아쓰기하듯 불러줬다. 원, 서, 산…… 뒤에서부터 한글자씩 불렀는데 마지막 ‘도’자를 부르자 한석봉은 자신이 존경하는 퇴계선생의 서원 편액임을 알고 너무도 황감하여 ‘도’자를 잘못 썼다고 한다. 이후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고 남았다. 도산서원 주변에는 퇴계가 좋아했다는 매화나무가 많다. 이 계절에는 붉게 타는 단풍이 봄에는 매화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학교다.
◆퇴계 선생 발길 따라 걷는 예던길
도산서원을 등지면 강 건너에는 섬처럼 솟은 둔덕이 있고 그 가운데 집 한채가 있다. 이것은 ‘시사단’으로 1792년 정조가 영남 사림을 위해 과거를 베푼 것을 기념해 세운 전각이다.
도산의 시대와 200년의 간극이 있지만 도산서원 앞에 이런 집이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1792년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해 규장각 대신 도산서원에서 제사를 지냈고 이때 과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사단이 세워진 것은 200년이 넘도록 식지 않았던 퇴계 선생에 대한 존경심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각은 원래 도산서원과 마주보는 강변 송림에 세워져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송림이 수몰됐고 10m 높이의 단을 쌓아 지금의 모습이 됐다.
도산서원을 시작으로 선생의 자취를 따라가는 길을 ‘예던길’이라 한다. 길을 따라 걸으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퇴계종택이다. 퇴계선생은 아마도 이 길을 따라 출퇴근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천천히 사색하며 걸어야 할 것 같다. 34칸 ‘ㅁ’자형의 퇴계종택은 그 당시 명망 높았던 학자의 집으로는 소박한 규모다.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본래 생가는 보존되지 못했고, 1920년대에 다시 지어진 집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선생의 종손이 지금까지 집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퇴계선생의 묘소가 있다. 선생은 죽기 전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돌 하나를 놓으라 했다고 전한다. 후손들은 작은 비석을 세웠고 묘소 또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하다.
예던길 코스 중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의 농암종택이 있다. 퇴계 선생은 농암 선생과 이웃사촌지간이었다. 농암종택 역시 안동댐 건설로 지금의 위치로 이사했으니 엄밀히 말해 원래 퇴계, 농암 선생이 다니던 길은 아니다. 다행히 그들의 학문적 교류와 인간적 교감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환갑이 넘어 노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농암 선생은 열린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퇴계 선생보다 나이가 33세나 더 많지만 두 선비는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에게 글을 써주기도 하는 등 깊이 왕래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걸었던 길은 얼마나 설레고 다정한 여정이었을까. 대학자에게도 친구는 필요했다. 깊어가는 가을, 친구와 함께 붉게 물든 이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여행 정보]
[대중교통으로 여행지 가는 법]
도산서원: 안동터미널 - 1번 버스 승차 – 교보생명 정류장 하차 – 67번 버스 승차 – 도산서원 정류장 하차
퇴계종택: 안동터미널 - 1번 버스 승차 – 교보생명 정류장 하차 – 67번 버스 승차 – 양평 정류장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도산서원: 검색어 ‘도산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퇴계종택: 검색어 ‘퇴계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6-2
퇴계선생묘소: 검색어 ‘퇴계이황선생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
문의: 054-840-6599 / http://www.dosanseowon.com
관람시간: (동절기) 오전 9시 ~ 오후 5시
관람료: 어른 1500원 / 청소년 및 군인 700원 / 어린이 600원
음식
도산대가: 도산서원 근처 식당으로 간고등어, 안동찜닭 등 안동 지방의 대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054-852-6660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2300
숙박
농암종택: 예던길에 있는 농암종택은 한옥스테이를 운영한다. 서원과 생가가 함께 있어 전체 규모가 일반 한옥보다 크게 느껴지고, 주변 경치가 수려하여 한옥을 체험하기 좋다. 종부가 마련하는 아침밥상도 특별하다.
054-843-1202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해맞이길 84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