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정신 꼿꼿이 아로새긴 '화성 만세길'
| 주곡리 마을회관에서 바라본 주곡리. 이 마을은 1919년 4월3일 화성지역 항일 무쟁항쟁의 출발지였다.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해다. 100년 전 횃불이 아로새긴 길을 미리 걸었다. 화성시가 오는 4월3일 공식 개통 예정인 ‘화성 3·1운동 만세길’이 그곳이다. 이 길은 1919년 4월3일 장안면과 우정면(읍)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의 족적을 복원한 노정이다.
| 버들저수지로 향하는 만세길 농로. 버들저수지 인근에는 차병혁 생가가 있다.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100년 전 횃불, 만세길 비추다
| 주곡리 차희식 집터. 왼쪽 하단의 똬리집 형태의 폐가가 주곡리 차희식 집터다(드론 촬영).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이곳은 각종 개발에 이끌려 들어온 외지인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100년 전 횃불이 들불처럼 번진 엄연한 만세운동의 항쟁지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우리의 처절한 역사에는 잠시도 곁을 내주지 않는 듯했다. 지역을 관통하는 ‘만세로’ 지명이나 인근 향남읍의 제암리 학살사건 얘기를 꺼내면 그제야 맞장구칠 따름이다.
| 화수리 주재소터 상공에서 바라본 쌍봉산(드론 사진).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1919년 4월1일. 우정면 보금산, 장안면 개죽산과 무봉산 등 인근의 산마다 횃불이 불타올랐다. 4월3일 수촌리의 백낙열은 준비된 태극기를 나누며 이봉구, 김익배, 김현조, 이종근, 우종렬, 우경규와 함께 지역민을 독려, 500여명을 동원했다. 화수리주재소장의 일본 순사를 참살했다. 이에 일제는 4월6~11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화수리까지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다. 사망 22명, 부상 17명, 투옥 34명. 500여명의 지역민을 고문하고 폭행했다.”
◆이례적인 조직적 무력항쟁
| 쌍봉산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촌리 방향.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이보다 앞선 운동이 장안면과 우정면의 3·1운동이다. 이 운동은 비폭력 평화기조의 다른 지역 3·1운동과 다른 양상을 띠었다. 헌병과 경찰의 무단통치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조직적인 무력항쟁을 펼쳤다. 항일의 거센 흐름은 주재소를 불태웠고 일본 순사를 처단했다. 경술국치 이후 이례적인 만세운동으로 평가되는 점도 이 때문이다.
| 쌍봉산 숲길.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만세꾼들이 한각리에서 주재소 공격 작전을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앞서 파괴된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소식을 화수리주재소가 모를 리 없을 것. 하지만 조직적으로 몰려오는 분노의 물결을 감당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화성 3·1운동이 매우 조직적인 무력 투쟁이었음을 시사한다. 앞서 횃불로 결의를 다지면서 거삿날을 확인했다. 또 면사무소, 장터, 주재소에 이르기까지 세를 불려온 항일투쟁은 만세꾼들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 항일운동 사적지로 지정된 수촌교회. /사진=박정웅 기자 |
그 결과, 일제의 보복은 잔인했다. 마을이 불탔으며 사망자(22명), 부상자(17명), 투옥자(34명)가 속출했다. 나아가 제암리의 만행(4월15일)까지 이어졌으니 이곳의 만세운동이 그만큼 치열했음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화성 3·1운동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31㎞ 횃불 만세길, 4월3일 개통
| 화산리 김연방 선생 묘소. /사진=한국의길과문화 |
만세길 개통까지는 석달도 안 남은 현재, 흔적 지워진 곳곳에서 100년 전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몇몇의 기록과 구전에 의존해 잔편을 꿰맞춰야 할 상황. 국내 유일의 3·1운동 테마길(걷기여행길)은 어쩌면 태생부터 가혹한 운명에 처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횃불의 ‘그날’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침없다.
| 화성 3.1운동 만세길 코스도(예정).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횃불 모양을 띈다. /사진=화성시 |
☞ 본 기사는 <머니S> 제576호(2018년 1월21~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