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담 사진전, 15일까지 서울 갤러리허브 개최
| 지난 9일 전시회를 개최한 신영담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
연행노정은 전통시대 한양과 연경을 오간 조선 사행단(사절단)의 이동경로로서 우리의 역사지리 공간이기도 하다.
신춘호 박사(문화콘테츠학·필명 신영담)는 연행노정 전문가로 꼽힌다.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인 그는 방송카메듀서로서 연행노정에 대한 기록사진을 공공전시한 바 있다. 또 실학박물관, 천안박물관, 심양총영사관과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길 위의 향연’(촬영·공동 연출)을 제작했다.
신 박사는 “길(路·路程)은 단순한 교통로를 넘어 문화와 문화가 교류하고 문명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 600여년 이상의 교류역사가 서려있는 연행노정 또한 인문유대의 현장이자 동아시아 문화로드”라면서 “연행노정은 조선을 벗어나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또 “연행노정 영상기록 작업은 연행록의 내용에 기반한 역사공간 기록”이라면서 “연행노정은 비록 중국에 산재하고 있지만 우리역사의 한 장면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의 역사지리에 대한 공간의 변화를 확장해 살펴볼 의미 있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신 박사가 연행노정을 주기적으로 관찰하고 변화를 기록한 영상역사학적 가치를 가리킨다.
신 박사는 2000년 8월 연행노정을 처음 답사한 이래 19년 간 연행노정의 변화를 추적해왔다. 이번 전시는 2007년 혜화갤러리 첫 전시회 이후 10여년 만에 개최돼 주목을 끈다. 당시 전시 타이틀(오래된 기억의 옛길)을 가져왔는데 ‘오래된 기억의 옛길’에 대한 연계·지속의 의미와 그간의 답사기록을 보완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신영담 사진전은 2월9~15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4층 갤러리허브에서 ‘아지트’ 주관으로 열린다. 지난 9일 첫 전시에는 연암의 7대 종손(박찬구씨)과 종친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전은 특히 작가의 특강을 중심으로 한 스탠딩 전시회 성격을 띤다. 연행노정에 대한 사전 설명, 사진과 관련한 답사 체험과 역사적 사실, 답사 소회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잇따라 사진전이 의도한 ‘추체험’을 가능케 했다. 신 박사는 내년 답사 20주년을 맞아 중국 베이징에서 관련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신 박사는 전시에서 “사절단은 궁궐에서 임금에게 하직하고 모화관에서 사대한 후 고양, 파주로 향했다. 임진강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리까지 남한지역 의주대로에 해당한다”면서 “개성-평양-의주로 이어지는 북한지역 의주대로 역시 기억하고 걸아야 할 역사공간이다. 남북교류가 빈번해지면 북방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분주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 성동구 갤러리허브의 연행노정 사진전. /사진=박정웅 기자 |
연행노정의 경로는 압록강-진강성-탕참-책문-봉황성-진동보-통원보-연산관-첨수참-요양-십리보-성경(심양)-변성-거류하-백기보-이도정-소흑산-광녕-여양역-석산참-소릉하-행산역-연산역-영원위-조장역-동관역-사하역-전둔위-고령역-산하이관-심하역-무령현-영평부-칠가령-풍윤현-옥전현-계주-삼하현-통주-연경(북경)이다. 다음은 신영담 사진전 개요다.
◆연행의 첫째마디, 요동을 걷다
사행단은 압록강 건너 구련성에서 요양의 영수사(혹은 십리하성) 일대까지의 동팔참 구간을 삼절의 첫째마디로 삼았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서면 사행단은 사람이 살지 않는 ‘봉금지대’인 인구련성과 총수참 일대에서 노숙을 했다. 당시 청은 요동지역의 일부를 조상이 흥기한 발상지라 여겨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설정했다. 책문(변문)에 들어서야 청으로부터 공식적인 사절단으로서 물품(하정) 지급, 숙박처(찰원) 제공, 행로 호위 등의 편의를 제공받았다.
동팔참은 원대의 역참 개념이 명대로 이어진 것이다. 비록 중국 땅에서 속하나 산천과 지리의 형세가 조선의 산하와 비슷해 사신들은 조선의 산천을 대하듯 했다. 더구나 요동지역은 고대로부터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점에서 사절단의 소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으로 이주했다. 전쟁 포로가 돼 심양으로 끌려갔다. 생경하고 척박한 만주 땅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다. 이들 일부는 청군에 종군하거나 역관의 삶을 살았다. 봉성시 문가보촌에는 대대로 역관을 지내며 살아온 문씨 집성촌이 있다.
| 연행노정 구간도. /사진=박정웅 기자 |
◆연행의 둘째마디, 고난의 현장을 걷다
조선 전기의 연행노정은 요양에서 서남쪽 안산과 우가장을 거쳐 광녕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후금은 요동 흥경에서 흥기한 이래 흥경-요양-심양에 차례로 수도를 정했다.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요동에서 명과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명을 무너뜨리면서 조선 사절단의 연행노정 역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청의 산해관 입관과 북경천도 이후 조선 사행단은 심양을 거쳐 광녕-십삼산-금주-산해관으로 이어지는 노선을 이용했다. 바로 연행의 둘째마디(중절)다. 중절 구간은 연행노정의 가장 고통스런 구간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강빈, 왕자, 재신, 백성이 심양에 억류됐고 삼학사는 이곳에서 순절했다. 중절구간은 양대 호란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연행의 중절구간은 심양에서 산해관까지의 구간이다. 대체로 이 구간은 사행단에게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게 하는 정신적 피폐함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아울러 생경한 자연환경의 고통을 체험해야 하는 육체적 피로감이 겹치는 구간이기도 했다.
◆연행의 셋째마디, 산해관을 지나 연경으로
연행의 종절구간은 산해관에서 연경에 이르는 구간이다. 산해관은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경계이면서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공간으로 압축된다. 사행단은 산해관에서 명의 몰락을 목도했고 다시 산해관 안에서 당시 오랑캐로 취급한 청의 실체를 확인했다. 하지만 관내는 선진문명의 현장이자 사대연행의 현실공간이었다.
종절구간에는 사행들이 꼭 들러 추념한 백이숙제의 사당인 이제묘(수양산)가 있다. 또 사행단의 주요 유람처, 명소, 기관, 장관의 현장들이 더러 남아 있다. 수백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신들의 행적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지명이나 개연성으로 당시 현장을 짐작할 수 있다.
◆연경에서의 인문유대
연행의 목적지는 연경이다. 사행단의 주요업무는 황제에게 보내는 임금의 서신을 전달하거나 국가간 외교 현안을 처리하는 각급 관서의 문서를 전달하고 답을 받아오는 일이다. 또 황제나 황실의 경조사를 하례하거나 새해 달력을 받아오는 업무와 공물의 납부, 사행무역도 주요 업무의 하나였다. 이러한 업무는 사행단의 숙소인 옥하관과 자금성의 각급 관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사행단은 공식 업무 외에 선진문물을 견학하거나 서양의 문물에 관심을 가졌다. 서양선교사, 천주당, 관상대로 대표되는 서구문물의 접변은 실학적 면모를 지닌 조선 지식인에게 반향을 안겼다. 특히 중국의 저명한 문인들과의 인문교류는 조선 지식인들의 자각과 성찰, 인문유대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한중인문교류는 홍대용의 건전동 교유를 비롯해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서호수, 김정희 등으로 이어졌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고 세계인식의 기회가 됐다.
◆뜻밖의 열하기행
연경에서 열하를 다녀온 사행단은 단 두차례 있었다. 1780년 건륭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인 박명원 일행가 1790년 건륜 80세 생일 축하사절인 황인점 일행이다.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진하사절의 정사인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참여해 열하를 다녀왔다. 이때의 견문을 <열하일기>로 남겼다. 10년 후인 1790년 박제가, 유득공, 이희경 등 젊은 지식인들 역시 황인점 일행의 막료가 돼 열하를 다녀왔고 이들 역시 연행기록을 남겼다.
열하는 강희제 때 건설하기 시작해 건륭제 시기에 완성한 황가의 피서지였다. 북경 외곽의 변경에 위치한 열하는 북쪽의 몽고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정치 군사적인 목적의 도시로 개발 성장했다. 황가 원림과 황제의 사냥 활동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기실 군사전략상의 요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티베트 등 이민족을 포괄하는 정치외교의 공간이었다.
연암의 열하일기 속 노정을 추적하며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고 반가운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밀운, 고북구, 양간방, 삼간방, 난하, 쌍탑, 경추봉, 피서산장 등 역사의 현장을 만나게 된다. 바로 뜻밖의 열하기행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