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에 핀 빙화(氷花), 짧은 일생 치명적인 순백미
태기산은 겨울에 매력을 더한다. 설경과 상고대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태기산(泰岐山·1261m))은 강원 횡성(둔내면)과 평창(봉평면)의 경계를 짓는다. 산에 깃든 얘기도 있다. 진한의 마지막 군주 태기왕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이번 겨울, 눈다운 눈을 보지 못해 눈꽃 대신 상고대를 만나러 태기산을 찾았다.
이른 새벽, 횡성군 둔내면 6번 국도에서 경강로로 접어들어 구불구불 산으로 올라간다. 오를수록 길 가장자리엔 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았다. 고도가 대관령보다 높은 해발 980m의 무이쉼터에 도착했다. 이곳은 횡성의 둔내에서 평창의 봉평으로 넘어가는 태기산의 고갯마루 ‘양구두미재’다.
◆횡성과 평창 경계 짓는 태기산 양구두미재
양구두미(兩邱頭尾)는 ‘한쪽은 머리고 한쪽은 꼬리가 되는 두 곳이 만나는 고개’라는 재미있는 이름이다. 아마도 횡성과 평창의 끝과 시작이 되는 두 군의 경계라는 뜻인 듯 싶다. 비둘기 구(鳩)자를 넣어 양구두미(兩鳩頭尾)로 달리 쓰기도 한다. 이장하려 묘를 파자 비둘기 두마리가 날아갔다는 유래에서다.
차단봉을 지나 태기산 정상으로 향한다. 녹지 않은 눈이 연신 ‘뽀드득 뽀드득’ 발에 밟힌다. 무이쉼터에서 정상가는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다. 날이 밝아오면서 조금씩 산의 모습이 드러난다. 풍력발전기들이 줄지어 서서 바람개비처럼 돌고 있다. 날개는 ‘위이잉 위이잉’ 소리를 내며 도는데 그 곁을 지나면 괜히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아, 상고대! 정상에 펼쳐진 얼음꽃 세상
태기산 정상이다. 가리왕산, 청옥산, 대미산, 청태산, 함백산, 태백산, 두위봉 등 첩첩이 둘러싼 산들이 파도치듯 일렁이며 밀려들어온다. 시성 두보(杜甫)가 태산(太山)에 올라 ‘뭇 산이 작은 것을 한눈에 굽어보리라’(一覽衆山小)라고 외친 마음이 이와 같았으리라.
몸서리치는 매서운 칼바람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얼음꽃. 상고대 빙화는 같은 순백의 세계이지만 눈꽃과는 다른 강인하고 명징한 멋이 있다. 햇살이 내릴 때 반짝이다가 화려한 일생을 마감하기 때문에 상고대는 겨울이 연출하는 최고의 미학이다.
◆차디찬 겨울, 산이 보듬은 태기왕의 사연
태기산성(泰岐山城)에 도착했다. 남아있는 30여미터의 성곽의 모습으로 옛 모습을 어렴풋이 구성해본다. 태기왕 시절에는 1800미터였다고 한다. 산성에는 진한의 마지막 왕 태기왕의 슬픔이 서려 있다. 신라에 밀려 북쪽으로 쫓기다가 이곳에서 산성을 쌓고 마지막 항전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패한 뒤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가 결국 멸했다. 나라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왕의 마음은 얼마나 처절했을까. 또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군에 쫓겨 다니는 신세는 오죽했을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630호(2020년 2월4~1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