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개나리가 개화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사진은 지난 1월 경북 포항시에서 개나리가 개화한 모습. /사진=뉴스1
개나리가 피었다. 봄을 알리는 춘삼월이 아니라 2019년 12월26일이었다. 양양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보타전을 지나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오르막길 오른쪽에 드문드문 많이 피었다. 동지에서 소한 사이는 일반적으로 가장 추운 한겨울이다. ‘한겨울에 개나리꽃이라니, 이 무슨 변고일까…’라고 걱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상한 것은 철부지 개나리뿐만이 아니었다. 작년 늦가을에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 힘들었다. 나뭇잎이 저마다 빛깔을 뽐내며 온 산을 수채화처럼 물들인 단풍 대신 바싹 마른 잎이 떨어지지도 못한 채 바람에 사각거렸다. 잎이 진 자리에 고운 털이 돋아 씨눈을 보호해야 혹독한 북풍한설을 이겨낼 텐데 겨울나기 준비를 하지 못한 나무들이 많이 띄었다.
◆자연이 먼저 알려준 코로나19

꽃과 나무, 곤충과 동물들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다. 문명의 이기에 무젖어 둔감해진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신기하게도 먼저 감지한다. 개미들은 큰 비가 오기 전에 기를 쓰고 높은 곳으로 집을 옮긴다. 새들도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 둥지를 단단히 동여맨다. 

1976년 7월28일, 중국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에서 일어난 리히터 규모 7.8의 지진으로 24만2400명이 죽고 16만4000명이 중상을 입었다. 부상으로 인한 불구자도 3800이나 됐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 발표일 뿐 실제 사상자는 70만명 이상, 사망자는 50만명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 지진을 다룬 영화 ‘당산대지진’의 시작 부분에 엄청난 잠자리떼가 도망가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코앞으로 다가온 지진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아무 것도 모를 것으로 여겨지는 잠자리들은 대지진을 감지하고 살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대나무 숲 전체가 꽃을 피운 뒤 말라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난도 환경이 좋을 때는 꽃을 잘 피우지 않다가 물을 잘 안 주면 꽃이 피고 죽는다. 촛불이 거의 꺼질 때쯤 가장 밝은 빛을 내다가 이내 사그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2019년 자연은 쉽지 않았다. 봄부터 늦여름까지 가뭄이 심했다. 식목일에 강원도에서 큰 산불이 났다. 어렵게 키운 벼가 꽃을 피우고 이삭을 맺으려 할 때 가을장마와 함께 9월 태풍이 몰려왔다. 나뭇잎이 단풍들어 떨어지지 못하고 줄기 끝에 애처롭게 달려 있었다. 겨울은 유난히 겨울답지 않게 이렇다 할 추위 없이 지나갔다. 2020년 입춘을 지나 꽃샘 한파가 다가왔고 뒤늦은 함박눈이 내렸다.

그리고 부르지 않은 불청객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찾아왔다. 자연은 작년 봄부터 여러 가지 기상이변으로 심상치 않은 변고가 엄습할 것임을 경고했으나 문명의 이기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그런 조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박물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

어떤 일이 일어난 뒤에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하는 것을 후견지명이라고 한다.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을 찾는 일은 비교적 쉽다. 후견지명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 가능성을 짐작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선견지명이다. 선견지명은 이미 발생했던 사건들을 곰곰이 새김질해 보면 조금씩이나마 계발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지나간 일을 굳이 되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 젖어 있으면 다른 일을 귀찮아한다. 변해야 할 때가 왔는데 미적미적대다 때를 놓치고 일을 그르친 뒤 후회하기를 되풀이한다. 아주 적은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일 세 번씩 반성하며 많은 사람을 갑자기 닥치는 불행에서 구해내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남한산성 안에 있는 만해기념관의 전보삼 관장은 그런 일을 하는 선각자 가운에 한 사람이다. 전 관장은 “박물관은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현재와 대화하며 미래를 위해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역사 유물을 자기만 알고 꼭꼭 숨겨 갖고만 있는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유물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현재에 더 많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거쳐 현재와 미래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바로 박물관의 존재이유”라는 설명이다.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뜻을 이어받는 게 중요하다.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2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남대문시장 관광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스1

◆낮은 곳으로 임해 넓고 크게 봐야

자연과 역사는 우리에 어떤 일이 몰려오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에 대응할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보고다. 자연과 역사가 알려주는 답을 적절한 시기에 알아차리려면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겸손이 절대적이다. 

‘주역’은 이를 ‘관리가 눈을 크게 뜨고 가을걷이를 살피는 림(臨)’으로 설명했다. “연못 위에 땅이 있는 모습에서 군자는 끝없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끝까지 백성을 보호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직접 가서 함께 느끼는 함림(咸臨)과 감언이설을 경계하는 감림(甘臨), 지극한 정성을 드린 지림(至臨) 및 올바른 다가가기를 강조하는 지림(知臨), 끝까지 경건하게 임하는 돈림(敦臨)을 단계별로 제시하고 있다.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이런 가르침을 받들어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미행에 나섬으로써 백성들의 실생활을 직접 알아보고 그에 맞는 올바른 정책을 펼쳤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을 최소한 줄이고 얼굴 표정을 부드럽게 해서 자문을 구한다면 백성들이 즐거워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밝힌 것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


단풍 대신 마른 잎과 철부지 개나리로 코로나19를 경고했던 자연에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있다. 경칩(3월5일)이 지나고 춘분(3월20일)이 오면 온갖 야생화가 피고 풀과 나뭇잎이 솟는다. 죽은 듯 숨죽이던 종자들이 단단한 껍질과 무거운 흙덩이를 들어올리고 살아있음을 힘차게 주장한다. 코로나19도 부활하는 생명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게 자연의 섭리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에 집단적으로 감염됨으로써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해뜨기 바로 전이 가장 어둡다. 가장 견디기 힘들어 포기하려고 할 때가 마지막 고비다. 깔딱고개를 넘으면 바로 정상이다. 막바지에서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다독거리고 희망을 주면서 고비를 이겨내도록 이끄는 사람이 바로 지도자다. 낮은 곳으로 임해서 새의 눈과 곤충의 눈과 물고기 눈을 가진 믿음 있는 지도자가 코로나19를 퇴치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34호(2019년 3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