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당초 개설 목적과 달리 허위사실과 정치 공세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관련 당국은 직접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다.
53만명 동의한 청원, 알고보니 거짓이었다
지난 3월2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저희 25개월 딸이 초등학생 5학년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청원인 A씨는 게시글에서 "3월17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 우리집에 놀러왔다. 평소에도 교류가 있었고 저희 딸이랑 잘 놀아준 뒤 하룻밤을 자고 갔다"고 설명했다.
A씨는 "다음날 저희 아이가 생식기에 고통을 호소해 병원에 갔더니 아이 소음순 쪽에 상처가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며 교류가 있던 집이라 좋게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아이 부모의 대응에 너무 억울하고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글을 올린다"고 전했다.
그는 "가해 초등학생 부모는 아들은 잘못이 없고 제 아이 잘못이라고 한다"라며 해당 학생과 부모의 처벌을 요구했다.
해당 청원글은 온라인을 통해 퍼지며 많은 이들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적극적으로 청원에 동참했고 해당 청원은 게시 마감일인 지난달 19일까지 53만3883명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이 청원글은 거짓으로 판명됐다. 경찰은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A씨가 청원글을 작성할 때 사용했던 이메일 주소를 토대로 역추적해 A씨의 신원을 확보했다.
경찰은 A씨와의 면담에서 나온 내용을 가지고 25개월 딸의 병원 진찰 기록과 가해학생의 부모 신상 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병원 진료내역은 사실과 달랐고 가해 아동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이 내용에 대해 경찰이 추궁하자 글 내용이 허위라고 털어놨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과는 지난 19일 청원인 A씨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정확한 범행 동기 등을 파악하기 위해 A씨를 조만간 소환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허위 청원' 그저 재미로만 하시겠습니까?
청와대 국민청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8월 문을 열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를 모토로 SNS 계정만 있다면 누구든 로그인해 청원을 제기할 수 있다.국민청원 게시판이 열린 이후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통해 묵혀뒀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일부 청원인들은 아무 의미 없는 글을 도배성으로 게재하거나 맹목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지자 청와대는 지난해 국민청원 검색 방식을 바꿨다.
진보와 보수 진영의 '정치세 경쟁장'이 되기도 한다. 지난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을 물어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이에 약 3주 뒤 '문재인 대통령님 응원합니다!'라는 청원이 게재돼 뜻밖의 세 싸움이 일어났다. 양 측은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해당 청원 링크를 '좌표' 찍으며 청원 참여를 독려하는 등 과열양상을 보였다.
두 청원은 이런 분위기 속에 도합 300만명(탄핵 청원 146만9023명, 응원 청원 150만4597명)이 참여했다.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는 취지의 청원이 정치세력의 기싸움판으로 변하자 일부 누리꾼들은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불필요한 글이나 허위 청원의 가장 큰 문제는 필요한 곳에 쓰여져야 할 공권력이 낭비된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청원 게시 이후 30일 이내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하면 직접 답변을 해야 한다. 민생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청원이라도 기준을 넘기면 무조건 답변을 준비해 관련 부처 관계자가 국민 앞에 선다.
경찰력이 허무하게 허비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청원 참여가 일정 수준을 넘기면 경찰이 무조건 수사해야 한다는 법적 기준은 없다. 하지만 청원이 청와대의 답변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거나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관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다.
한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 2월쯤에도 '동생이 공원으로 끌려가 심하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청원이 올라와 사건 조사에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허위 청원이었다. (이런 허위청원은) 형법상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될 수 있다"며 게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형법 제137조에 따르면 위계로써 공무원의 직무집행을 방해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