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벤틀리’ 꿈꾸는 정의선
정 부회장은 2015년 11월 현대차가 갖고 있던 고급세단인 에쿠스를 제네시스로 통합하며 ‘독립 브랜드’로 출범시켰다. 당시 프리미엄 자동차시장에 대한 전망은 밝았다. 당시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IHS에 따르면 2015년 약 900만대 규모인 프리미엄 자동차시장이 5년 뒤인 2020년이면 1000만대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자동차시장의 약 10%를 프리미엄 자동차가 차지할 것으로 내다본 것.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2015년 글로벌 자동차시장 규모는 약 8900만대였다. 이후 매년 9600만~9800만대 수준을 맴돌고 있다.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국내는 고비용 저생산 구조”라며 “고비용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고효율화에 집중해 한 대를 팔아도 수익을 많이 남기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생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단순히 고가 자동차라고 해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업계에선 입을 모아 브랜드 인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제조사 역사와 차별화된 디자인, 주행과 첨단기능, 공간 활용성 등 복합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실현될 수 있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정 부회장은 제네시스 브랜드에 고급 이미지를 심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바꿨다. 브랜드 독립 출범과 함께 프레스티지 디자인실을 신설하는 등 브랜드 전담 조직까지 갖추며 제네시스 고급화 전략에 속도를 냈다. 이듬해 제네시스의 마케팅을 전담하는 제네시스 전략팀과 상품성 개선 등에 집중하는 고급차 상품기획팀을 신설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제네시스의 빠른 정착을 위해 파격적인 외부인재 영입에도 나섰다. 이탈리아의 고급 브랜드 람보르기니를 진두지휘했던 맨프레드 피츠제럴드를 제네시스의 수장으로 앉혔다. 기존 현대차의 디자인과도 선을 긋기 위해 루크 동커볼케 전 벤틀리 수석디자이너를 현대디자인센터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수입차업계 관계자는 “제네시스가 해외 유명 브랜드에 몸담고 있던 인재를 공격적으로 영입하면서 품질을 대폭 개선해 왔다”며 “최근 GV80, G80 등을 통해 보여준 디자인, 상품성 등은 수입차와 견줘도 뒤지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제네시스의 수준이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렉서스 벤치마킹한 제네시스
시장에선 제네시스와 렉서스를 비교한다. 브랜드 출범 시점과 인지도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대중 브랜드의 고급화 전략으로 탄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까닭이다. 현대차가 제네시스 브랜드를 출범할 당시 ‘일본의 대표적 대중 브랜드인 토요타의 고급화 브랜드인 렉서스를 벤치마킹했다’는 평이 많았다.캠리 등 대중을 위한 자동차에 집중하던 토요타는 1989년 렉서스를 론칭, 미국시장에 첫발을 내딛었다. 브랜드만의 정체성을 담은 디자인인 ‘패밀리룩’을 최근 들어 정립해 나가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가로형 그릴, BMW의 키드니 그릴처럼 렉서스도 2015년부터 모래시계 형상의 스핀들 그릴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고유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제네시스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방패를 떠올리게 하는 크레스트 그릴이 제네시스의 패밀리룩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올해 GV80과 G80를 통해 보여준 두 줄의 쿼드램프 역시 보는 순간 “제네시스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디자인 요소가 됐다는 평가다.
“26년 품질격차 좁혔다”
한·일 양국의 대중 브랜드가 선보인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와 렉서스. 두 브랜드의 출범 시기만 놓고보면 26년 정도의 격차가 있다. 프리미엄 브랜드를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가 브랜드 역사인 만큼 아직 시장에서 렉서스를 제네시스의 위로 보는 시각이 많다.판매량에선 아직 비교하기 어렵다. 2019년 렉서스의 글로벌 판매량은 76만5330대로, 제네시스(7만7195대)보다 10배 가량 많다. 다만 최근 제네시스를 향해 쏟아지는 세계시장의 평가는 판매대수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제네시스가 출범 채 5년도 안돼 품질력으로 렉서스를 넘어섰다는 평이다. 2020년 2월 글로벌 자동차시장의 중심지인 미국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제이디파워(J.D. Power)가 발표한 ‘2020년 내구품질조사’(VDS)에서 제네시스가 렉서스를 누르고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해당 평가 결과는 제네시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VDS는 차를 구매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차주들에게 177개 항목을 제시하고 품질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렉서스가 2019년까지 8년 연속 지켜온 VDS 1위 자리를 프리미엄 자동차시장의 후발주자인 제네시스가 넘어섰다. 이는 벤츠, 포르쉐, 재규어, 뷰익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해외 유명 브랜드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이제 품질 좋은 차라고 하면 렉서스 대신 제네시스가 떠오른다는 의미다.
제네시스는 짧은 브랜드 역사에도 글로벌 프리미엄 자동차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2019년 6월에는 제이디파워의 ‘2019 신차품질조사’(IQS)에서 2년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했고 3년 연속 프리미엄 브랜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18년 말에는 제네시스의 G70이 세계 최고의 자동차 전문지로 꼽히는 미국 모터트렌드로부터 ‘2019 올해의 차’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국 자동차가 이 같은 평가를 받은 것은 역대 최초다.
제네시스 브랜드가 단기간에 호평을 받으며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이면서도 치밀하고 꾸준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김필수 교수는 “명품 브랜드가 되기 위해선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현대차의 역사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법인분리와 정비망 구축 등으로 현대, 기아와 다른 제네시스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작업도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48호(2020년 6월9~1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