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낮 12시. 32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제1443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열렸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마포쉼터 소장이 사망한 후 처음으로 열리는 수요집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했고 언론의 취재열기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이날 한낮 무더위에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달궈진 아스팔트보다 더 뜨겁게 일본의 사죄를 외쳤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집회 시작 전 '도라지타령'이 흘러나왔다. 먼 타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위안부 피해자들은 우리말을 다 잊고 고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한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도라지타령이 나오는 내내 '정의연을 지지합니다' '조중동 폐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지난달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 후원금 유용 의혹을 폭로하면서 위안부 집회와 정의연을 향한 논란이 불거진 상황. 이날 집회에서 피켓을 든 시민들은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대신 정의연을 더 믿는 분위기였다.
"TV조선 왜 왔냐" "TV조선 XXX"
집회 초반 TV조선 카메라가 나타나자 곳곳에서 질타가 이어지기도 했다. '조중동 폐간' 피켓을 든 시민들은 더 강렬하게 움직였다.
손영미 소장 사망… 눈물의 수요집회
이번 수요집회 첫번째 순서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 고 손영미 소장에 대한 추모였다.
이날 오전에는 지난 6일 파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손 소장의 발인식이 '여성·인권·평화·시민장'으로 엄수됐다.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손 소장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극히 보살펴 왔다며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나온 뒤 약력을 소개하는 이마저 울먹거리며 손 소장을 추모했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고 손영미 소장의 발인식을 마친 뒤 검은옷 차림으로 취재진 앞에 섰다.
이 이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의 죽음 뒤에도 각종 예단과 억측, 무분별한 의혹 제기, 책임 전가와 신상털이, 유가족과 활동가에 대한 무분별한 접근과 불법촬영까지 언론의 여전한 취재행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사장님 수고가 많으셔서 어쩌나요. 할머니 식사 잘하시고 잘 계십니다'가 저와 나눈 마지막 문자였다"면서 "검찰의 과잉수사, 언론의 무차별한 취재 경쟁에 힘겨워했는데도 길원옥 할머니의 안위를 우선시하던 소장님을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집회에 참여한 김태현 21세기 조선의열단 단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권한을 무리하게 이용하는 것 같다"며 손 소장의 사망 의혹 중 하나인 검찰의 과한 수사를 꼬집었다. 김 단장은 "검찰이 공정하게 수사해야 한다"며 "검찰의 수사로 피해자들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손 소장을 향한 추모는 그가 담긴 액자 앞 노란 국화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정의연 의혹… 시민들은 '지지 피켓' 들었다
정의연 후원금 유용 의혹에도 이날 집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정의연 의혹에 시민들의 신뢰가 떨어져 집회 인원이 적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린 학생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정의연을 지지합니다' 피켓을 들고 여느때와 다르게 집회를 이어갔다. 또 이번 의혹의 당사자인 정의연 이사장 출신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A양(15)은 "정의연 의혹은 말 그대로 의혹으로 나온 상황"이라며 "의혹을 진실로 믿고 위안부 집회까지 배척하는 순간 일본만 즐거운 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 소장을 추모했던 김 단장도 "정의연은 위안부 할머님들을 전세계적으로 알렸던 단체"라며 "폄훼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윤미향 의원을 향한 확인되지 않은 의혹들을 제기하면서 정의연이 30년 동안 해온 일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리는 건 일본에게 오히려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정의연 사태를 안타까워했다.
정의연 사태를 안타깝게 보는 건 우리 국민뿐만이 아니었다. 재일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동석(한국 이름)씨는 "30년동안 정의연이 열심히 운동을 해온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일본의 위안부 만행이 드러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꾸준히 다뤘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의연 사태를 두고 "잘못한 점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위안부 집회 등 모든 걸 무너트릴 필요는 없다"면서 "지난 30년 동안 부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그러는 이유가 뭐냐"고 반문했다.
이씨는 "정의연 사태로 일본의 문제를 긍정하는 행동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면서 "한국에서 위안부 집회를 계속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썅*들아" 온갖 고성이 오간 집회 현장
이날 수요집회 근처에서는 정의연을 수사해야 한다는 반박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반박 집회 참여자들은 윤 의원을 향한 비난을 쏟아 부었다. 이들은 "윤미향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 속으로 '헉' 했겠다"고 발언하는 등 위안부 집회가 열리는 내내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았다.
특히 각 연대에서 위안부 관련 추모 연설을 하는 와중에도 스피커를 크게 틀고 국민의례를 하며 애국가를 제창했다.
정의연 반박 집회를 지켜본 일부 시민들은 "썅*들아" "미친거 아니야" "저 싸가지 없는 **들 여기와서 **이야"라며 분노했다.
반박 집회 참가자가 위안부 집회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약간의 충돌이 일기도 했다. 이를 본 경찰들은 양 측 사이에 서서 집회가 이뤄진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집회 본질 '일본 사죄'… 일본인들도 외쳤다
이날 집회에서는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 측 사죄를 외친 일본인들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일본인은 "한국에서 3년간 살면서 일본의 만행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며 "나도 일본인이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해 일본 측은 사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한자어로 '위안부 피해 일본 사죄'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땀을 흘리며 집회 자리를 지켰다.
정의연 지지의 목소리를 내비쳤던 재일교포 이씨도 "독일은 과거 나치즘의 잘못을 인정하고 현재까지 사과하는데 일본은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며 "'돈으로 해결했잖아'라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안부 집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힘을 모아서 더 이를 알리는데 노력해야 한다"며 "일본 오사카에서도 한달에 한번씩 위안부 집회를 열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 소장의 사망 이후 첫 수요집회는 이처럼 다양한 목소리의 시민들이 광장을 메웠다. 하지만 일본 사죄를 요청하는 집회의 의미는 여전히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