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필리핀에서 '스트롱맨'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후임을 뽑는 최대 정치 이벤트가 내년 5월9일 총선거와 함께 치러진다.
집권 초부터 수차례 헌법 개정을 추진하며 장기 집권을 노리던 두테르테 대통령의 야욕을 막아 세운 건 민중 혁명으로 1987년 이룩한 6년 단임제의 현행 헌법이었다.
1986년 2월7일 밤 의회가 장장 20년을 집권해온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재선을 발표하자, 민주화를 열망해온 시민들은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된다.
도화선이 된 건 3년 전 미국 망명길에서 귀국 직후 암살된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의 최후. 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시민들의 정권 교체 열망을 담아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했지만 부정선거 의혹으로 패배하자 들고 일어선 것이다.
코라손 아키노는 2월9일 지지자들과 함께 시민 불복종 캠페인을 발표했고, 이때부터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피플 파워 레볼루션(People Power Revolution)으로 불리는 민주화 혁명으로 결국 1986년 2월25일 마르코스가 망명하고 아키노가 취임하게 된다.
이후 마련된 개헌안이 1987년 2월2일 국민투표를 통과하면서 페르디난드가 계엄 하에 발표한 1973년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부터 6년 단임제가 자리잡게 된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87년 체제는 위협을 받았지만, 필리핀 시민들은 그때마다 간신히 민주화의 산물을 지켜냈다. 2016년 초기부터 줄곧 연방제를 주장해온 두테르테 대통령의 개헌 시도도 집권 연장 '꼼수'라는 비판 속 저지됐다.
그런 필리핀의 87년 체제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흔들리게 된 건 마르코스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가 압도적인 유력 후보로 올라서면서다.
펄스아시아리서치가 지난 1~6일 2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3%가 마르코스 주니어를 찍겠다고 응답했다.
2위는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두테르테 대통령의 강력한 '정적(政敵)'이자 제1야당을 이끌고 있는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이지만 지지율 20%로 격차가 상당하고,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와 다른 5명의 후보는 모두 10%에 못 미쳤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선전이 더 눈에 띄는 건 그의 부통령 러닝메이트가 바로 두테르테 대통령의 장녀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이란 점이다.
필리핀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같은 날 선출하긴 하지만, 별개의 투표로 진행해 엄밀히 말하면 러닝메이트는 아니다. 다만 이번 선거에서 두테르테-카르피오 시장은 유력 후보로, 같은 여론조사 결과 45%의 지지를 받고 1위에 랭크됐다.
부통령의 경우 2위인 티토 소토 상원의원이 31% 지지율로 바짝 뒤쫓고 있지만, 두테르테-카르피오 시장은 정식 출마 전부터 지지율 1위를 달리던 유력 '대선' 후보였던 만큼 그의 당선은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
87체제를 낳은 대대적 시민불복종을 초래한 독재자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와, 87체제 전복을 시도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카르피오 시장이 선전할 수 있는 건 그들의 가문이 본래부터 필리핀 정계의 유력 가문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치에서 가문의 힘은 정당의 힘을 능가한다. 이에 두 후보 모두 '가업'을 잇고자 일찍이 정치 수업을 받고 탄탄한 경력을 쌓아왔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1980년 23살의 나이에 마르코스 가문의 '영지' 북일로코스 부지사로 정계에 입문, 2010년 상원의원이 되기 전까지 주지사를 지냈다. 2016년 선거 때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로브레도 현 부통령에게 단 몇 천 표 차이로 석패했다.
마르코스 가문의 권력 '회복'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이자 남편의 장기 집권 기간 수도 마닐라 시장과 주택환경부 장관 등을 지난 이멜다 마르코스는 남편이 하와이 망명 중 사망하자 귀국, 1992년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두테르테-카르피오 시장은 아버지 두테르테의 정치적 근거지인 다바오시 부시장으로 2007년 본격적인 정치수업을 시작했다. 2010년에는 자신이 시장을 맡고 전직 시장인 아버지가 부시장을 맡는 '희한한 인수인계'를 거친 뒤, 2016년 재선에 성공했다.
사라 뿐만 아니라 두테르테 대통령의 두 아들도 모두 유력한 정치인이다. 장남은 하원의원, 차남은 다바오시 부시장이며, 모두 두테르테 대통령 재임 기간 당선됐다.
한국에서 스트롱맨으로 알려진 두테르테 대통령은 집권 기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닮았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그는 201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유해를 '마닐라 영웅 묘지'에 안장하며 한 번 논란을 일으켰고, 그의 외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를 '적절한 후계자'라 일컬으며 두 번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임기 초반부터 벌여온 마약 근절 정책이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이고 조직적인 공격 소지가 있다'는 취지로 지난 9월 전면 조사 허가를 받은 뒤로 몸을 사리고 있다. 인권 단체들은 이 '마약과의 전쟁' 기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조사 결과 혐의가 명백해지더라도, 내년에 마르코스-두테르테 정권이 들어설 경우 처벌 가능성은 미지수다.
필리핀 현대사에서 다소 어두운 과거를 가진 두 가문 마르코스-두테르테 '막강' 조합이 내년 대선 유력 후보로 자리매김하면서, 필리핀에 오랜 족벌 체제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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