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2월 마지막 주에는 칠레, 중국, 일본 등 각국을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들의 책이 들어왔지만 자전적 이야기를 투영한 최다혜 작가의 그래픽노블 '아무렇지 않다'가 돋보인다.
'바다의 긴 꽃잎'은 칠레의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스무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친척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쿠데타로 사망한 이후 오랜 기간을 망명해야 했다.
'마지막 연인'은 '중국의 카프카' 불리는 찬쉐가 권태기를 겪는 세 부부의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기이한 행동을 포착한 작품이다.
'나쁜 토끼'는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로 유명한 일본의 추리 소설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초기작이다.
'아무렇지 않다'는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투영한 그래픽 노블이다. 최 작가는 디지털 작업이 아니라 아크릴물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을 통해 인물의 섬세한 감정들과 차가운 현실을 잘 드러냈다.
등장인물은 담담히 자신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지만 가난이 다양한 모습으로 불쑥 끼어든다. 삽화가 김지현은 자신의 책을 출간하고 싶어 하지만 외주 작업에만 매달려 살아간다. 강은영은 미학을 전공했지만 불안하고 막막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시간강사다. 이지은은 회사도 그만두고 재료비와 생활비를 아껴가며 그림을 그리는 무명작가다.
이들이 겪는 삶은 독자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난의 핍진함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주인공들의 일상에 갑자기 송곳처럼 깊숙이 파고든다. 소설가 박서련의 추천사처럼 "나로서도 알지 못하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내가 짓는 표정"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 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글그림/ 씨네21북스/ 1만6500원.
시간강사 강은영이 교보문고에서 책을 구매하면서 강의를 맡은 대학에 전화를 건다. 곧 다가오는 2학기의 수업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조교는 강의배정이 안 되었다고 사무적으로 대답한다. 그녀가 책값을 계산한 이후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방에서 우두커니 앉아있기까지의 과정은 아무런 대사도 없지만 인물의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불행은 늘 초대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을 겪는 이들에게 그것이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 말하는 더 큰 무례를 범한다. 살고자 불행과 맞서고 있는 이들에게 세상은 이렇게나 잔인하고 예의가 없다"
"종종 발목을 잡는 가난보다 미웠던 건, 가난을 떨쳐내지 못하는 나의 어쭙잖은 재능이었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나를 덜 미워할 수 있었을까"
◇ 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 1만7000원
칠레의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최신작이자 스무 번째 소설. 스페인 내전을 겪은 주인공들이 파시즘의 광풍을 피해 세상 건너편 칠레로 망명을 떠나 그곳을 또다른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뿌리를 내리는 기나긴 여정이 문장으로 펼쳐진다.
"로세르가 아이토르의 손을 잡아 자기 배 위로 가져가서 태동을 느껴 보게 한 걸 보면, 그녀가 아이토르의 걱정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아이토르, 걱정하지 말아요. 이 아이는 안전해요. 더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녀가 연달아 하품하며 말했다. 남자는 로세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흐느꼈다. 그 순간 그는 그녀의 체취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그녀 때문에 울었다. 그녀가 아직 혼자가 되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었다"(96쪽)
"네루다의 시는 망명자들에게 자기네 목적지가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밝혀 주지 못했다. 지도 위의 칠레는 길쭉하고 먼 나라였다. 사람이 몇 분마다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보르도 광장은 바글바글 들끓었고, 새파란 하늘 아래 더위로 거의 숨이 막혀 죽을 듯했다. 기차와 트럭, 그리고 사람으로 꽉 찬 차량이 속속 도착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민 수용소에서 바로 나와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몰골에 굶주리고 쇠약했다"
◇ 마지막 연인/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은행나무/ 1만6000원.
'중국의 카프카' 불리는 찬쉐는 실험적이고 강렬한 언어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곤 한다. 필명 찬쉐는 '녹지 않는 더러운 눈'과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가장 순수한 눈'을 아우르는 말이다.
소설 '마지막 연인'은 권태기를 겪는 세 커플의 모습을 조명한다. 의류 회사에서 영업부 매니저로 일하는 존과 아내 마리아, 의류 회사 사장 빈센트와 아내 리사, 회사의 고객이자 고무나무 농장주인 레이건과 농장의 일꾼 에다가 그들이다.
"장미꽃이요. 좋죠. 그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기르는 꽃이에요. 이곳에 왔던 사람이 자신의 장미꽃이 미쳐서 끊임없이 꽃을 활짝 피워 자신의 마당을 사시사철 붉게 물들인다고 하더군요"
◇ 나쁜 토끼/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내친구의서재/ 1만8000원.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로 유명한 일본의 추리 소설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초기 작품이다. 주인공 하무라 아키라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탐정이다. 청소부, 전화상담원 등을 전전하는 그가 가출한 여고생 미치루를 데리고 와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쉬운 사건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사를 계속할수록 사라진 소녀가 여러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칼이 만약 1센티미터 정도 빗나갔더라면 갈비뼈가 아니라 중요한 내장을 다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사가 말했다. 동그란 얼굴의 외과의사는 '참 운이 좋네요'라고 말했지만 악당 대신 자기가 칼에 찔리는 입장이 되어 보면 그 의사도 운이 좋다는 말은 입에 담지 못하리라"(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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