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접경 지역인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에서 피란민들이 도보로 국경을 넘고 있다. 2022.3.5/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메디카(폴란드)=뉴스1) 원태성 기자 = 메디카 국경 검문소로 가는 길. 검문소를 200m 앞둔 도로에서 오후 1시18분이었던 휴대전화 시계는 한순간 2시18분이 됐다. 바뀐 시간은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의 코앞까지 다다랐음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한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방향 검문소 전방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는 4일(현지시간) 오후 달리는 버스와 구급차, 화물차들 사이로 전쟁을 피해 온갖 역경을 뚫고 여자와 아이들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지쳐서 축 늘어진 그들의 팔에는 집채만한 트렁크가 제멋대로 끌려왔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접경 지역인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 쉼터에서 한 음악가가 희망을 전하기 위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2022.3.5/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적게는 몇시간 많게는 5~6일에 거쳐 전쟁을 피해 힘겹게 걸어온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자원봉사자와 그들이 준비한 음식, 옷가지 등 구호물품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 소리를 따라 이동한 시선은 피란민들이 폴란드 내 다른 도시들이나 국가들로 이동하기 전 머물기 위한 임시 쉼터로 마련된 주차장 입구에 다다랐다. 그 곳에는 베이지색 재킷에 중절모를 쓴 20대 남성이 자전거에 부착된 검정색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날 날씨는 휴대전화를 만지기 위해 주머니에서 꺼낸 손이 30초만에 시려워질 만큼 바람이 불고 쌀쌀한 날씨였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은 남성은 쉬지 않고 연주를 이어갔다.

임시 쉼터로 이동하던 피란민들도 고향 혹은 삶의 터전을 떠나온 슬픔과 고통을 잠시 뒤로 한채 잠시나마 그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을 멈추지 않고 연주하던 그는 두번째 곡이 끝나자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이름은 다비드 마칼로. TV를 보고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 독일 북부지역에서 50~60시간이 걸려 피아노를 들고 무작정 이곳으로 왔다고 밝혔다.

그는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라며 "내가 모든 것을 잃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이어 "다른 봉사자들이 음식과 옷들을 나눠주듯 나는 음악을 피란민들에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 연주를 이어갔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접경 지역인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 쉼터에서 피란민들이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2.3.5/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마칼로가 전하는 희망의 연주가 혼란스러운 메디카 국경 검문소 주변에 울려퍼지는 동안 힘겹게 국경을 넘어온 피란민들에게는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단순히 먹을 것과 의류, 장난감등 물품을 지원하는 것만이 아니다.
폴란드 내에서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 이외에도 영국, 독일, 프랑스, 터키 등 많은 국가들에서 당장 갈곳이 없는 피란민들에게 정착할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많은 봉사자들이 이 곳을 찾았다.

지난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지난 3일까지 발생한 120만명의 난민들 중 약 40만명이 폴란드로 넘어온 만큼 이 곳은 포화 직전의 상태까지 왔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의 국가에서 피란민들이 정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이 머물 곳을 알아보는데 도움을 줬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접경 지역인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 쉼터에서 인도·영국 이중국적인 피란민이 자원봉사자에게 지원을 안내받고 있다. 2022.3.5/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인도 태생이면서 영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아산(38)에게 영국 자원봉사자는 급히 다가가 갈 곳이 있냐고 물었다.
아산은 아내와 6살, 4살 아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넘어왔다. 그는 키이우(키예프)에서 오랜 시간 금융업에 종사 하다 전쟁이 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했다.

영국 자원 봉사자들은 아산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었고 그는 "영국으로 가고 싶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화 될때까지 2~3달 그곳에 머물면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 영국 자원봉사자는 빠르게 어딘가로 전화해 이야기를 나눈 뒤 아산에게 "가능하다"라며 추후 일정을 설명했다. 아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신뒤 왜 영국에 머물고 싶냐는 질문에 "호날두를 좋아한다"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많은 도움의 손길에도 모든 사람들이 메디카 검문소 임시 쉼터에서 아산과 같이 도움을 받고 정착할 곳을 찾지는 못했다.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어 임시대피소로 향하게 됐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접경 지역인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 쉼터에서 피란민들이 가족과 함께 임시 대피소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가족을 찾고 있다. 2022.3.5/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그마저도 임시 대피소 향하는 버스는 모든 피란민들을 다 태우지 못했다. 검문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빈 쇼핑센터에 차려진 임시 대피소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하려하자 수많은 피란민들이 그 곳에 가기위해 몰려들었다.
40인승의 대형버스는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좌석은 물로 서있는 공간까지 가득찼다. 그럼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장사진을 이뤘다. 버스 운행을 돕는 두 남성은 "자리가 없다"고 소리치며 밀려드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그 때 버스 안에서는 "아직 내 가족이 타지 않았다"는 처절한 한 여성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짐을 싣느라 미처 타지 못한 자신의 아들을 태우기 위한 여성과 가드들의 실랑이 끝에 결국 버스는 아들을 태우지 않고 떠나버렸다. 마치 전쟁 영화에서 가족들이 난리통에 생이별을 하는 모습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었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접경 지역인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에서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차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구호 물품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2022.3.5/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전쟁이 시작된지 1주일이 지난 상황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2차협상이 끝난 뒤 민간인 대피에 대해 합의를 했기 떄문에 앞으로 피란민들은 더 많이 이 곳으로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유엔난민기구는 1000만명의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혼잡한 검문소에서 울려퍼지는 피아노 소리처럼 수많은 도움의 손길은 분명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정말 피란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끝이 아닐까.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의 아픔은 어떠한 도움과 위로에도 치유되지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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