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수장인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사실상 ‘가계부채 저승사자’로 군림했다.

지난해 8월 말 취임 후 가계대출을 옥죄일 대로 옥죄였다. 1800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가계빚의 증가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강도 높은 가계대출 규제에 고삐를 죈 것이다.

지난해말 국내 가계부채는 1862조1000억원으로 1년새 134조1000억원 급증했다. 금융권 전체 가계대출에다 카드사와 백화점 등의 판매신용을 합한 규모다.
그가 총량관리 등 온갖 규제를 동원한 결과 실제로 가계대출 증가율은 지난해 8월 이후 눈에 띄는 하락세를 보였다.
 
전 금융권의 전년동월대비 가계대출 증가율 추이를 살펴보면 지난해 7월까지만 해도 10.0%로 두자릿수에 달했다가 같은 해 10월 8.6%, 11월 7.7%, 12월 7.1% 이어 올 1월 6.3%, 2월 5.6%를 기록, 절반 수준으로 급락했다.

고승범 위원장이 취임 이후 실시한 고강도 가계대출 규제가 가계대출 증가세 둔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계빚 억제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가계대출 규제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민심은 싸늘했다. 대출난민 양산과 예대금리차 확대 문제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가계대출 총량관리는 서민 실수요자들을 대출절벽으로 내몰았고 피해를 일으켰다. 대출금리 급등도 야기했다.

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주식·부동산 등으로 유입되기도 하지만 모든 대출이 투기로 흘러가진 않는다. 일관적인 가계대출 총량관리를 고집하다보니 대출을 받기 어려워진 애먼 실수요자들의 불안과 피해도 키웠다.

급기야 가계대출 규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호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잔금대출을 받지 못해 분양을 포기하는 사례 등 현재까지도 청원 게시판에는 대출 규제로 자금 마련이 어려워졌다는 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대출난민이 늘어난 것도 문제지만 한정된 가계대출 총량을 두고 수익을 내야 하는 은행권은 대출 가산금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예대금리차의 급격한 확대로 이어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잔액 기준 예대금리차는 지난해 1월까지만 해도 2.07%포인트에 그쳤지만 올 1월 2.24%포인트로 집계돼 2019년 7월 이후 2년6개월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1년새 0.17%포인트나 벌어졌다.

금융소비자의 이자부담 고통은 날로 늘어났다. 대출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대출자 10명 중 1명은 소득의 5% 이상을 이자를 내는데 더 써야한다는 게 한국금융연구원의 분석이다. 가계빚이 역대 최대치로 치솟은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대출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는 5월 출범을 앞둔 새 정부는 이러한 여론을 의식해 가계대출 규제 완화를 준비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후보 시절부터 LTV(주택담보인정비율) 80% 완화를 약속한데 이어 가계대출 총량관리 폐지와 차주별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 완화 등을 검토 중이다. 총량관리 등 대출 규제 목표 달성에만 매몰돼 발생하는 실수요자 등 피해를 줄인다는 취지다.

요즘 고 위원장 거취는 금융권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새 정부와 현 정부의 최대 당면과제로 핵심 금융정책인 가계대출 정책 방향이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31일 취임해 임기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고 위원장이 새 정부에서 임기를 이어갈 지 금융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