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기업은 기술로 경쟁하지 경영권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최근 만난 한 신생 바이오업체 대표의 말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떠올리면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구글과 엔비디아, 애플, 메타(페이스북) 같은 기업들은 창업자와 경영진이 경영권 다툼이 아니라 기술 혁신과 시장 확장에 집중하며 성장해 왔다. 경쟁력이 지배권 방어가 아니라 기술과 시장에서 나온다.


실리콘밸리에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도전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VC)과 인큐베이터(창업지원기관), 기술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형성돼 있다. 기업이 성장한 뒤에도 핵심 경쟁력은 경영권 방어가 아니라 혁신이다. 장기적인 기술 개발과 시장 확대 전략이 기업가치의 중심축을 이룬다. 창업자와 투자자가 기술과 시장 가능성을 중심으로 협력하는 생태계가 혁신을 이끄는 힘이다.

하지만 국내 혁신기업의 현실은 다르다. 제약·바이오 기업이 대표적이다. 창업자 간 갈등이나 경영 승계 과정의 가족 분쟁, 대주주 간 이해 충돌, 소액주주와 경영진 사이의 대립 등 다양한 형태의 경영권 분쟁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구조적 이유도 있다. 대기업은 계열사 지분이나 순환출자 등을 통해 오너 일가가 비교적 안정적인 지배력을 유지한다. 반면 중견·중소 혁신기업은 창업자 개인 지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경영권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기업 성장 과정에서 외부 투자를 반복적으로 유치해야 하는 구조 역시 지배력 약화를 부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더 취약하다. 신약 개발에는 통상 10년 이상이 걸리고 막대한 R&D(연구개발) 자금이 투입된다. 임상과 기술개발을 이어가기 위해 여러차례 외부 자금을 수혈 받아 창업자 지분이 희석되는 경우가 많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10~30% 수준에 머무는 기업도 적지 않다. 지배력이 약해질수록 경영권 분쟁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달 주주총회를 앞두고 대표 등 사내이사 선임이나 정관 변경 등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잦아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특히 중견·중소기업은 자금력이 취약한 데다 최대주주의 상속세·증여세 부담으로 지분 매각이 이어지면서 지배구조가 더 약해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영권 분쟁은 단순한 지분 다툼에 그치지 않는다. 갈길 바쁜 혁신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제약·바이오기업 한 임원은 "잦은 경영권 불안에 창업주나 전문경영인이 제때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업 이미지 하락까지 겹쳐 주가 변동성을 키우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기업 이미지가 흔들리면 투자자 신뢰가 약해지면서 대규모 자금 조달에도 부담이 된다. 사람이 기술로 불리는 업계 특성상 인재 이탈로 이어져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그래서 혁신기업만큼은 최소한의 경영권 안정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23년 도입된 비상장 벤처기업 복수의결권 제도도 이런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에서는 활용이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제도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경영권 안정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방패일 뿐이다. 기업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쌓는 노력도 필요하다.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해 경영진을 견제하거나 소액주주와 설명회 정례화, 전담창구 마련 등 소통 방안이 거론된다.

혁신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구든 피땀 흘려 만든 기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그 험난한 창업에 나설수 있을까.

AI(인공지능) 패권 경쟁 시대다. 이재명 정부가 'AI 3대 강국 도약'과 '창업중심 사회'를 국정과제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어도 법과 원칙을 지키는 혁신기업은 기술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 그것이 혁신을 키우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송정훈 미래산업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