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중동 긴장 완화로 안정되고 있지만, 누적된 고유가·고환율 충격과 반도체 호황에 따른 수요 확대가 겹치면서 물가 상방 압력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시장에선 한국은행이 오는 7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추가 긴축에 나설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17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5월 수출입물가지수 및 무역지수(잠정)'에 따르면 수출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46.9% 상승하며 11개월 연속 오름세를 이어갔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에 따른 메모리 반도체 가격 강세와 원화 약세 영향이 맞물린 결과다.
특히 D램 가격은 1년 전보다 259.7%, 플래시메모리는 223.0% 급등했다.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 수출물가지수는 2010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고환율 환경은 수출기업의 원화 환산 수익성과 채산성을 개선시키며 국내 소득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수출물량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4.7%, 순상품교역조건지수는 18.7% 상승했고 소득교역조건지수는 36.1% 뛰었다. 수출 가격 상승폭이 수입 가격 상승폭을 웃돌면서 국가 구매력도 크게 개선된 것이다.
반면 국제유가 하락 영향으로 수입물가는 두 달 연속 하락했다. 원재료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입물가 상승 압력은 다소 완화됐다. 실제 미국과 이란의 종전 양해각서 체결 이후 국제유가는 빠르게 진정되는 모습이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이달 초 배럴당 90달러 안팎까지 치솟았지만, 최근에는 80달러 수준으로 내려왔다.
심수빈 키움증권 연구원은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 기대가 반영되면서 유가가 5월 말 대비 약 12% 하락했다"며 "다만 실제 통항 정상화와 산유국 생산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해 WTI는 당분간 배럴당 70달러 후반∼80달러 중반 수준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가 상승세가 한풀 꺾였지만, 한국은행 내부에서는 누적된 공급 충격이 소비자물가로 확산되는 '2차 파급효과' 가능성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날 공개된 5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일부 금통위원들은 중동발 고유가 충격이 지속되는 가운데 고환율 전이효과와 반도체 기업의 임금 상승이 더해지면서 물가 상방 위험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위원들은 공급 충격이 수요 압력과 결합해 인플레이션이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높은 경계감을 갖고 통화정책 여건을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금통위에선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기업 이익이 성과급과 배당, 세수 증가 등을 통해 가계 소득으로 이전되면서 내수 압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소득 증가와 고유가 충격이 맞물릴 경우 물가의 2차 파급효과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요국 중앙은행 긴축 기조…한은 금리 인상 힘 실어
시장에서도 공급 충격이 서비스 물가와 근원물가로 확산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안정세를 보이더라도 누적된 에너지 가격 충격과 고환율, 반도체 호황에 따른 소득 증가 등이 맞물리면서 물가 상방 압력이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이 7월 금통위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선제 대응에 나설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최지욱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외식 제외 개인서비스를 중심으로 근원물가 상승 압력이 나타나고 있다"며 "근원상품과 외식물가도 추가 상승 가능성이 높아 올해 3분기 소비자물가가 고점을 형성한 뒤 완만하게 둔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한국은행은 올해 7월과 10월 두 차례 금리를 인상해 최종금리 3.0%를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아래에서 안정된다면 하반기 물가 둔화 흐름이 재개될 수 있지만, 100달러 수준이 장기간 유지될 경우 물가 정점 시점이 4분기로 늦춰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물가 경계 속에 긴축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점도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고, 일본은행(BOJ)도 전날 정책금리를 연 0.75%에서 연 1.0%로 올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역시 당분간 매파적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금통위에서도 "성장 우려는 상당 부분 완화됐지만 물가 불안 요인은 커진 상황"이라며 공급 충격의 전이효과와 수요 측 물가 압력, 임금 상승 확산 가능성 등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잇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