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가시권에 들면서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 구도도 바뀔 전망이다. 개별 상품을 얼마나 많이 판매하느냐보다 여러 사업장의 자금을 모아 장기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성과를 관리하는 역량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호주는 장기 분산투자와 엄격한 성과평가를, 영국은 계약형과 기금형 간 경쟁과 독립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앞세워 시장을 발전시켰다. 국내 금융회사들도 해외 제도의 정착 과정과 운용체계를 살펴보며 변화에 대비하고 있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중 기금형 퇴직연금의 구체적인 도입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기존 계약형 제도와 기금형을 병행하면서 금융기관 개방형과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기금을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현재 국내 퇴직연금은 금융회사가 개별 기업과 계약을 맺고 적립금을 관리·운용하는 계약형이 중심이다. 기금형이 도입되면 여러 사업장의 적립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모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용할 수 있다. 대규모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자산관리 역량과 성과관리 체계, 폭넓은 가입자 기반을 갖춘 금융회사가 유리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제도 도입을 앞두고 금융권의 관심은 기금형 퇴직연금을 먼저 정착시킨 해외로 향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 맞는 운용 방식과 관리체계를 설계하려면 해외 제도의 성과뿐 아니라 가입자 보호와 운용 부진을 통제하는 장치까지 살펴봐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퇴직연금 적립금 53조원 규모의 하나은행도 지난해 호주와 영국의 연금 관련 기관 16곳을 방문해 기금형 제도의 정착 요인과 운영 방식을 점검했다.
호주에서는 머서(Mercer)·CFS 등 소매형 기금과 ART·어웨어슈퍼(Aware Super) 등 산업형 기금, 자산운용사를 포함한 10개 기관을 찾았다. 하나은행이 주목한 것은 퇴직연금을 장기자산으로 보고 주식과 채권뿐 아니라 부동산과 인프라 등에 분산투자하는 운용 구조다.
운용 성과를 감독하는 체계도 살펴봤다.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은 '성과평가(Performance Test)'를 통해 기금의 운용 결과를 점검하고, 성과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금에는 개선을 요구한다. 기금 규모를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 수익률과 가입자 이익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구조다.
영국에서는 네스트(NEST) 등 6개 기금을 방문했다. 영국은 자동가입을 통해 가입 기반을 넓히는 동시에 계약형과 기금형이 경쟁하는 시장을 구축했다. 여러 사업장이 하나의 기금에 참여하는 '마스터 트러스트(Master Trust)'에서는 독립적인 트러스티 이사회가 운용과 관리에 관한 주요 의사결정을 맡는다.
2012년 자동가입 제도를 도입한 것도 시장 확대의 전환점이 됐다. 제도 시행 전 47% 수준이었던 영국의 퇴직연금 가입률은 2025년 82%까지 상승했다. 가입자는 늘리고 독립적인 지배구조와 사업자 간 경쟁을 통해 비용과 서비스 수준을 관리한 것이 특징이다.
하나은행은 현지에서 확인한 운용·관리 사례를 하나금융그룹 계열사와 공유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는 별도 회의체를 운영하며 국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 필요한 역량과 대응 방향을 논의 중이다.
기존 퇴직연금 사업의 외형과 사후관리 서비스도 확대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비교공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하나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53조166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2조7040억원보다 24.5% 증가했다. 증가율은 4대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하나은행은 금융권 최초로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운용 서비스'를 출시하고, 은행권 최초로 전문가가 선정한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는 '하나MP 구독 서비스'를 선보였다. 연금 전문 상담센터인 '연금 더드림 라운지'를 지방으로 확대하는 한편 가입자의 운용 성과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관리체계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한국공인노무사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 지원에 나섰다. 공인노무사회 소속 노무법인이 퇴직연금 규약의 작성과 검토, 신고·수리 절차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호주와 영국은 서로 다른 경로로 퇴직연금 제도를 발전시켰지만 가입자의 노후자산을 장기간 축적하고 전문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도와 운용체계를 지속적으로 보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해외에서 확인한 사례를 그룹 차원에서 공유하고 국내 적용 가능성과 제도 변화에 대한 대응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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