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석 동행미디어 시대 고문


AI 챗봇 창에 질문을 입력하고 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몇 초.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아주 오래된 몸짓을 반복하고 있다. 신탁을 구하러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을 찾은 고대인의 몸짓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녀의 모호한 예언 대신 지금은 완결된 문장, 매끈한 논리, 각주까지 갖춘 듯한 답변이 즉시 도착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답이 종종 그럴듯한 거짓말, 이른바 '환각'이라는 데 있다. 여기에 정교한 딥페이크와 편향된 추천 알고리즘까지 뒤섞이면, "도대체 무엇을 진리와 사실로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지적 불안을 넘어 사회 전체의 인식론적 위기가 된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이 택하는 길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알고리즘의 답을 새로운 신탁처럼 떠받들거나, 아니면 모든 정보를 의심하는 냉소주의로 도망치는 것.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바로 이 갈랫길 사이에서, 인간이 실제로 걸어갈 수 있는 세 번째 오솔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믿고 걸을 만한지 과학사의 몇 장면을 통해 가늠해보자.



전통적인 과학철학은 오랫동안 과학을 '인간과 독립된 절대적 진리를 거울처럼 비추는 일'로 그려왔다. 이를 과학적 실재론, 그리고 진리 대응설의 관점이라 부른다. 이 관점의 매력은 분명하다. 과학이 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면, 우리는 흔들림 없는 확실성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신화는 곧바로 흔들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체계를 떠올려보자.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은 이 모델은 처음에는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행성의 관측 데이터가 쌓일수록 오차가 발견되었고, 천문학자들은 그 오차를 메우기 위해 원 위에 또 다른 작은 원을 얹는 '주전원(epicycle)'을 계속 추가했다. 결과적으로 매우 복잡하지만 상당히 정확하게 작동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 체계는 '우주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관측을 예측하기 위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도구였을까.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이후 우리는 지동설이라는 답을 알고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작동했던' 이론도 우주의 참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하석 교수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우주 밖으로 걸어 나가 세계를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을 결코 가질 수 없다. 그런데도 과학을 절대무오한 교리처럼 가르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백신의 드문 부작용이나 기후 모델의 예측 오차 같은 작은 틈만 보여도, 대중은 과학 전체를 거대한 사기극으로 몰아세우는 극단적 불신에 빠져버린다. 지나친 신격화는 반드시 지나친 불신의 반작용을 낳는다.



반대편에는 상대주의자들이 서 있다. 이들은 "진리란 결국 사회적 합의나 권력관계의 산물일 뿐"이라며 과학의 객관성 자체를 깎아내린다. 얼핏 겸손하고 비판적인 태도처럼 보이지만, 장하석 교수는 이 역시 또 다른 극단이라고 본다. 과학을 '그저 그런 의견 중 하나'로 격하시키는 순간, 우리는 백신과 미신을, 기후과학과 음모론을 구별할 근거 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전자가 과학을 흠집 하나 없는 신성한 교리로 우상화했다면, 후자는 과학을 아무 권위도 없는 잡담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두 극단 모두 결국 사람들을 알고리즘이나 권위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삼키게 만들거나,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주의로 이끈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장하석 교수가 내놓는 대안은 '행동하는 실재주의(Activist Realism)'다. 그에 따르면 지식이란 머릿속에 담긴 정적인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라, 세상을 상대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실천적 능력'이다. 진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탁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자연과 부딪힐 때 막힘없이 굴러가는 작업적 정합성(Operational Coherence)의 결과물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과학사의 사례가 저자의 유명한 저서 《온도계의 철학》에 있다. 바로 온도 측정의 역사다. 지금 우리는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18세기 과학자들에게는 커다란 난제였다. 물의 비등점은 기압에 따라 달라지고, 수은과 알코올은 온도에 따라 다르게 팽창하며, 애초에 '온도'라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해야 정확한지조차 합의되어 있지 않았다. 온도의 '참값'을 신의 관점에서 미리 알고 시작한 과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온도계들을 비교하고, 눈금을 맞추고, 반복 실험을 통해 오차를 줄여나가면서 점차 서로 들어맞는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작업적 정합성'이다. 절대적 진리를 미리 손에 쥐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여러 방법이 서로를 지지하며 안정된 체계로 수렴해간 것이다. 오늘날 병원의 체온계와 기상청의 온도계가 서로 다른 숫자를 내놓지 않는 것은, 이 지난한 실천적 조율의 결과이지 처음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장하석의 사유는 크게 세 가지 통찰을 던져준다.
첫째, 유창한 언변과 참된 지식을 구별하는 기준이다. 생성형 AI는 방대한 텍스트를 조합해 매우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장하석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매끄러운 문장도 그 자체로는 지식이 아니다. 지식의 진위는 '실재와의 상호작용'에서 판가름 난다. 실제로 비행기를 띄우고, 질병을 치료하고, 배터리를 작동시킬 때 자연이 보여주는 저항을 성공적으로 다뤄낸 경험만이 지식이다. AI가 만든 환각에 속지 않으려면, "말이 그럴듯한가"가 아니라 "이 지식이 현실의 실천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둘째, 오류를 딛고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건강한 신뢰다. 과학은 완전무결해서 신뢰받는 것이 아니다. 조잡한 도구와 불완전한 가설로 시작해 끊임없이 오차를 교정해가는 '인식적 반복'의 역사 덕분에 신뢰를 얻는다. 18세기 화학자들은 물질이 탈 때 '플로지스톤'이라는 가상의 물질이 빠져나간다고 믿었다. 지금 보면 완전히 틀린 이론이지만, 이 이론은 당대 실험 결과를 상당 부분 설명하며 나름의 정합성을 갖추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틀린 이론의 틈새, 즉 금속을 태우면 오히려 무게가 늘어난다는 이상한 현상을 파고들어 마침내 산소 이론으로 넘어갔다.

중요한 것은 플로지스톤 이론이 "틀렸기 때문에 쓸모없었다"가 아니라, 그 오류를 딛고 더 나은 이론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AI가 내놓은 답을 절대적 정답으로 떠받드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반증하며 다듬어가는 '태도로서의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AI 시대에 되찾아야 할 습관이다.

셋째, 단 하나의 정답을 거부하는 다원주의적 포용이다. 장하석 교수는 단 하나의 궁극적 이론만이 옳다는 독단을 버리라고 말한다. 빛의 본성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좋은 예다. 빛은 어떤 실험에서는 파동처럼, 또 어떤 실험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한다. 물리학은 결국 '둘 중 하나가 틀렸다'고 선언하는 대신,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개의 기술 체계가 공존하는 '상보성'의 틀을 받아들였다. 이는 단일 알고리즘이나 독점적 플랫폼이 내놓는 획일화된 정답에 매몰되지 않도록 생각의 여백을 넓혀주는 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실천적 실용주의를 현실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만만찮은 장애물이 있다. 음모론자들도 '그들만의 닫힌 정합성'을 만든다. 기후변화나 거시경제처럼 개인이 실험실에서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영역에서는, 그들의 닫힌 논리를 실천적 기준만으로 즉각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의 문외한인 보통 시민들은 알고리즘의 흐름에 쉽게 휩쓸려 다른 길로 갈 수 있다.

장하석의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우리에게 완벽한 진리의 목록을 쥐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AI의 현란한 언변에 휘둘리지 않고, 두 발을 현실에 디딘 채 세상과 씨름하는 법을 일깨운다. 온도계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지난한 실천적 조율을 통해 신뢰를 얻었듯, 우리가 AI 시대에 붙잡아야 할 것도 완결된 정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검증하고 교정해가는 태도다. 다만 이 개인적 태도만으로는 음모론의 닫힌 논리를 깨뜨리기 어렵고, 알고리즘 자본의 구조적 왜곡을 막을 수도 없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좋은 이정표는 길의 방향은 알려주지만, 그 길에 놓인 웅덩이와 낭떠러지까지 대신 치워주지는 않는다. 결국 지식이란 모니터 속 텍스트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내는 실천이라는 점, 그리고 그 실천을 뒷받침할 제도와 연대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점, 이것이 알고리즘 시대를 건너는 우리가 이 책을 펼쳐 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