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소한 추억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 피맛골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을 지켜 온 빈대떡 전문점 ‘청일집’. 1945년 해방 직후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약 65년 동안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담은 이곳이 지난 2월6일 영업을 마지막으로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됐다.

청일집은 피맛골 재개발과 함께 주변의 음식점들이 하나 둘씩 옮겨갈 때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터줏대감 청일집의 마지막 영업을 끝으로 ‘청일집’은 물론 허름한 술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피맛골 역시 오롯이 추억으로만 남겨지게 된 셈이다.
 
허름해서 더욱 편안하고 정겨웠던, 그렇기에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속 얘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던, 피맛골에서의 65년 이야기. 청일집의 임영심(62) 사장으로부터 들어봤다.  

♦도심 속 마음의 고향,역사가 되다
 
1970년대 지금의 남편 박정명씨에게 시집 온 이후 시어머니의 대를 이어 청일집을 운영한지 40여 년. 임영심 사장은 옛 장소를 떠난 아쉬움을 "하루도 빠짐없이 늘 빈대떡을 뒤집던 익숙한 불판 앞을 떠나니 사실 여간 어색하지 않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사 가기 며칠 전부터는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마음으로는 오랫동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잖아. 또 이사 가면 아무래도 예전 같을 순 없으니까 장사 걱정도 되고. 그런데 용케 어떻게들 알고 옛날 손님들이 다 찾아와. 장소는 바뀌었어도 사람이 옛날 그대로니까 처음보다는 걱정도 많이 덜었고. 그러니까 내가 우리 손님들에게 얼마나 고맙겠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건 옛 청일집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영구 보존될 계획이라는 것. 옛 청일집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빼곡히 담긴 벽이며, 그곳에서 사용했던 막걸리 주전자, 메뉴판 까지 고스란히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됐다. 임 사장은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껏 청일집을 운영하면서 그냥 빈대떡집이 아니라 우리 서민들한테는 속 풀이를 할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라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박물관 같은 데 남겨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는데 서울역사박물관의 젊은 직원들이 먼저 와서 제안을 하는 거야.
 
사실은 서울역사박물관의 관장님도 대학생 때부터 30년 우리집 단골 손님이고, 박물관 직원들도 종종 우리집에 와서 막걸리 기울이고 했거든. 물론 박물관 측에서 논의를 거쳐 결정한 일이지만, 박물관 직원이라는 걸 떠나서 한 사람으로서 우리 청일집에 특별한 추억을 갖고 그걸 알아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 반갑고 고마운 일 아니겠어.”
 
어디 박물관 직원들 뿐일까. 실제로도 청일집은 광화문 근처의 직장인들은 물론 내로라하는 정치인이며 연예인들까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막걸리 한 잔에 속 풀이를 할 수 있는 고향과 같은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청일집에 쌓여 있는 세상살이의 추억들이 한둘이겠는가.

임 사장은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와 황영조 선수가 찾아와 막걸리 한잔 기울이며 세상사는 얘기를 나눴던 얘기,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이곳에서 기타치며 노래를 불렀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분도 다녀가셨고, 영화배우 최진실도 교보문고에서 영화촬영을 마친 후 이곳에서 야식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단다.
 
♦"나는 빈대떡 부치는 공인"
 
이야기가 무르익자 임 사장이 처음 시집와서 힘들었던 개인적인 사연도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한다.
 
“1971년에 남편한테 시집을 왔는데, 조그마한 일본식 집 건물에서 빈대떡을 팔고 있는 거야. 나도 처녀 때는 고급 레스토랑 다니고 그랬는데 하루종일 서서 빈대떡 부치는 게 좋을 리가 있나.

그런데 신기한 게 매일 빈대떡을 부치다 보니 무엇보다 손님들이 먼저 좋아하고 알아주니까 내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거야. 일식 건물에서 우리 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우리 음식인 빈대떡을 판다는 것도 뿌듯했고.”
 
그때 생각이 났는지 잠시 말을 멈춘 임 사장이 이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옛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때만해도 종로가 지금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어. 우리 청일집이 있던 골목엔 한 줄로 쭉 빈대떡 집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무교동 쪽엔 낙지집이 늘어서 있었거든. 그런데 그 많은 빈대떡집 중에서도 우리집은 정말 인기가 많았어. 사람이 늘 북적거리고.”
 

손님층도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지금은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돼 사회 각계각층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는 양반들이지만, 그때만해도 풋풋하고 가난한(?) 대학생이 술 마실 곳을 찾아 피맛골을 연신 들락거리곤 했다고.
 
“특히 연고전 끝나면 장관이었지. 그 많은 학생들이 모두 이곳에 우루루 몰려와서 막걸리 마시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하고, 패배의 아쉬움을 달래기도 하고. 그때 돈 없는 대학생들이 외상값 대신 가장 많이 맡겼던 물건이 시계랑 학생증이었는데.허허”
 
“지금이야 다들 카드 먼저 내밀지 외상 맡기는 사람이 없다”며 달라진 분위기를 아쉬워하는 임 사장은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서 다 그렇게 변해가는 게 사람 사는 모습 아니겠냐”고 말한다.
 
그 역시 흐르는 세월에 며느리에게 가게를 물려 줄 준비를 천천히 하고 있다. 

임 사장은 “지금은 임신 중이라 쉬고 있지만, 우리 며느리도 빈대떡 부치는 솜씨가 너무 좋다”며 연신 자랑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며느리에게 가게를 물려 받으라고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스스로도 시부모님의 강요가 아니라 좋아서 가게를 물려 받았듯이, 며느리도 그렇게 마음을 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마음이란다. 가게 일을 돕는 며느리를 볼 때면 그래도 이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고. 

신기한 것은 쉴 새 없이 많은 얘기를 들려주는 중에도 임 사장의 두 손이 쉬지 않고 움직인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랴, 빈대떡 부치랴, 손님들 맞으랴, 정신이 없을 것만 같은데도 임 사장의 손에서 내어지는 빈대떡은 타지 않으면서도 노릇노릇하게 적당히 잘 익어있다. 
 
“내가 자부하는 게 지금까지 빈대떡 부치면서 한 번도 손님들한테 덜 익었다 맛없다는 얘기는 안 들어 봤거든. 이 손님들이 일부러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이유가 뭐겠어. 빈대떡 맛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빈대떡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최고로 맛있는 빈대떡을 부쳐야 고마운 손님들한테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는 거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빈대떡 부치는 사람일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생각하며 빈대떡을 부친다”는 임 사장의 말이 이해가 갈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