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명언이다. 중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쟈핑와가 <친구>(이레刊)에서 한 말이다. 쟈핑와는 내 시간의 대부분을 친한 친구들이 점령하고 있다면서 마치 ‘밥상에 놓인 생선요리와 같다’고 속내를 고백한 적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도 와서 한 점, 저 사람도 와서 한 점씩 발라먹어 결국 뼈밖에 남지 않는 그런 생선으로 ‘우정’을 비유한 것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 피카소는 언젠가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단다.
“친구는 떠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이전에는 나와 친구였지만 절교를 했거나 소원해진 친구들이 생각날 때면 그들의 장점이 떠오르면서 언제나 소름이 끼치도록 낙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다. 내가 그토록 낙담을 했던 까닭은 친구를 나 자신이나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는 친구일 뿐이다. 친구는 봄날의 꽃이다. 겨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꽃이다. 친구는 꼭 지기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기가 꼭 친구일 필요도 없다. 지기가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나를 먹을 수도 있고, 나를 훼손할 수도 있다. 그게 뭐 대수겠는가?”
그런가 하면 일본 연예계를 대표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친구에 대한 생각은 또 어떠한가. 그는 <생각노트>(북스코프刊)에서 이렇게 ‘우정’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한다.
“우정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중략) 네가 곤란하면 나는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곤란할 때 나는 절대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너를 도와주었는데 너는 왜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하는 식은 처음부터 우정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마치 쟈핑와의 ‘밥상에 놓인 생선요리와 같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우정이란 내가 저쪽에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생선요리)이지, 저쪽에서 얻을 수 있는 뭔가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얼마 전 일이다. 나는 출판사 문학동네가 펴낸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의 하나인 <세한도>를 감동하며 읽었던 적 있다. 그 무렵이다. 조선 사람들 모두가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에게 등 돌릴 때 ‘얼굴 한번 본적도 없는 사이’였던 역관 이상적 선생(1804~1865)이 추사에게 보여준 행동(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수많은 책, 붓과 먹, 벼루, 종이 등을 지속적으로 제주도에 있는 추사에게로 보내준 우정을 말한다). 즉 이러한 우정은 가히 쟈핑와가 한 말이나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을 훨씬 시대에서 앞지르는 ‘우정’이 아닐까라고 난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사는 또 어땠는가. 그는 ‘세한도’를 그리며 우정에 답한다. 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 피카소가 단지 ‘겨울에 볼 수 없는 꽃’으로 우정에 대해 비유해 정의한 것보다 훨씬 세련되고 멋지다. ‘꽃’보다 ‘나무’로 비유해서다. 요컨대 <논어> 자한에 등장하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정’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게, 있는 그대로(감동적이다) 전달한다. 친구는 봄날의 꽃이다. 겨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꽃이다, 라는 피카소의 말도 참 멋지다. 하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겨울이 되어서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르다”는 희망적인 우정의 진리를 재발견하는 추사의 관점은 더더욱 멋지고 신선하다. 한국인 정서에 그대로 통한다. 이 때문에 훨씬 감동적이다.
생각해 보자. 추사는 평소 <논어>를 즐겨 읽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관주(貫珠, 중요한 구절에 오른쪽에 둥근 모양의 표시를 한 것)든, 아니면 비점(批點, 관주와 같지만 오른쪽에 점으로 표시한 것)으로 책에 표시를 남겼을 것이다. 때로는 필사(筆寫, 붓으로 베끼는 것)도 응당 마다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 수시로 적었을(述 )것이다.
옛사람이 대나무를 그릴 때는 반드시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하고 나서야 붓을 들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추사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추사 전문가인 고문헌연구가 박철상은 <세한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대로 소개한다.
붓을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우선(이상적을 말한다)의 절개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 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이 매달린 소나무 하나, 그리고 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설렁했다. 집 안에는 누가 있을까. 추사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저 앙상한 나무들마저 없다면 그 쓸쓸함을 저 집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추사는 또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렇다. 글씨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명구를 말한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6). 한학자인 그는 중국 베이징의 골동가게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왜 그랬을까. ‘명품의 탄생’을 보았기 때문이다. 2007년 5월22일. 서울 옥션의 경매 현장에서 화가 박수근의 ‘빨래터’가 무려 49억2000만원에 낙찰된 적 있다. 그렇다면 추사의 ‘세한도’를 과연 경매에 붙인다면 얼마쯤에 낙찰될까?
하지만 난 그것이 궁금하지 않다. 다만 나는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제주도 유배시절(1884년)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정치에 소름이 끼치도록 낙심하면서 이에 좌절하지 않고 명품 ‘세한도’를 친구 이상적을 위해 마음 그대로를 표현한 ‘우정’이 새삼 지금에도 인간적이기에 놀라면서 감동할 뿐이다.
인생과 비즈니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술술 풀리는지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이것만은 확신한다. 무언가를 적을 때(述), 아니면 술(酒)자리나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술술 풀린다’는 것은 경험했기에 안다. <사장의 노트>의 저자인 하세가와 가즈히로는 “나는 노트를 기록하는 습관을 통하여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었고 수많은 지적 재산을 얻었다”고 자신의 성공 비결이 ‘메모 습관’인 것을 고백한 바 있다. 그렇다. 삼류는 돈 없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이류는 약간 다르다. 돈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투덜대지 않고 솔직히 적었을 뿐이다. 이게 ‘차이’다. 그러니 자기발전을 위해서 ‘기록하라’는 것이다. 하세가와 가즈히로의 경우, 자신의 ‘머리가 굳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 이 세가지가 있단다.
1. 틈 날 때마다 ‘읽고 쓰고 계산’한다.
2.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3. 손을 사용해 무엇인가 만드는 작업을 한다.
1은 메모이니 ‘술(述)’이다. 2는 의사소통을 말하니 ‘술(酒)’이다. 3은 궁극적으로 재주를 완성하는 ‘술(術)’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일류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발전을 위해 ‘술술술 자기경영’을 스스로 할 줄 안다. 성공과 실패하는 인생과 비즈니스의 차이도 알고 보면 부단히 적고, 안 적고의 아주 단순한 차이 때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 칠두령의 청석골 남자들에게 부족했던 게 있었다면 문자를 워낙 싫어하는 메모 습관이 결여된 점을 들 수 있다. 이를 나는 술(術)편에서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