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대기업 총수가 구형 지프를 이용하는 이유는 갤로퍼 신화와 연관돼 있다. 갤로퍼 신화는 현대家의 첫 완성차 제품인 갤로퍼를 출시 1년 만에 지프 점유율 51%에 올려놓은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갤로퍼는 정 회장이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 시절부터 구상한 자동차사업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자동차 사업을 준비하는데 4륜구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현대정공(현 모비스) 초대 사장이기도 했던 정 회장은 이 회사를 통해 1991년 갤로퍼 양산을 시작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출시 5개월 만에 4륜구동 1위를 차지하더니, 7년 연속으로 지프분야 1위를 고수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시장도 갤로퍼 효과를 맛봤다. 연간 2만대에 불과했던 4륜구동시장이 갤로퍼가 등장한 이후 10만대로 성장했다. 지금의 RV(레저용 차량)시장을 갤로퍼가 키운 셈이다.
갤로퍼 신화 이후 현대차는 승승장구했다. RV 붐을 이끈 싼타모를 이듬해 출시하고 아반떼, 티뷰론, EF쏘나타, 그랜저XG, 싼타페 등 연이은 히트작을 출시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1968년 직원 590명으로 첫 모델인 코니타를 생산하던 현대모타주식회사로 출발해 2010년 6만명에 가까운 직원들의 터전이 됐다. 직원 규모로만 100배의 확대를 이룬 것이다.
‘싸구려 자동차’라는 외국의 인식도 현대·기아차를 막강한 신흥 브랜드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외신의 표현이 현대자동차 그룹의 놀랄만한 성장을 대변해주고 있다. 지난해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자동차 그룹 가운데 최고의 실적을 올렸으며, 올해도 540만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정 회장은 20년 전 현대차 신화의 전초가 됐던 갤로퍼를 이끌고 신화 재연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선대 회장이 그토록 염원했던 제철소 완공이다. 7전8기의 현대家 철강 도전기. 4월8일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준공행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선행학습이다.
선대회장의 못다 이룬 꿈
“철강은 역시 박태준이야.”
포브스 한국판 기자로 근무했던 이임광 씨의 저서 <정몽구와 현대·기아차, 변화를 향한 질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정주영 전 명예회장에게는 통한의 한이었다고 설명한다.
1978년 10월 박 대통령은 제 2제철, 즉 현재의 광양제철소 사업권을 두고 정주영과 박태준을 저울질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손을 들어줬고 정 회장의 첫 번째 철강 도전은 광양제철소 건설 사업 참여에 만족해야 했다.
두 번째 도전은 1994년이다. 정 회장은 가까운 미래에 철강 수급이 부족할 것이라는 이유로 부산 가덕도에 제3제철소를 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철강 공급 과잉이라는 주장에 막혀 꿈을 접어야 했다.
이듬해 정부는 태도를 바꿔 현대 측에 ‘포항제철에 고로 1기를 신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 회장은 정부가 1년 앞의 수급전망도 못 보는 현실에 기가 차면서도 남의 논에 물이나 대주고 있는 처지도 썩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철이 부족하면 포철에 고로를 증설하게 해주면서, 현대그룹이 제철소를 짓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당시 정 회장을 묘사하고 있다. 대통령이던 김영삼 씨가 1992년 대선 경쟁자였던 정 명예회장에게 정치보복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이때 나돌았다고 저자는 의문을 던졌다.
대를 이은 도전, 시련의 연속
“철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불가피하다.”
1996년 그룹의 리더가 된 정몽구 회장은 취임사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을 것을 강력히 천명했다.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는 철강 부족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미 인천제철 대표로 경력을 쌓고 있던 정 회장은 회장 취임 후 곧바로 종합제철사업 프로젝트팀을 발족시켰다. 총 책임자는 당시 부사장이었던 이계안 전 국회의원이었다.
프로젝트팀을 통해 제철소 입지로 선정된 경남 하동은 정 회장의 본관이었다. ‘현대 특별시’가 들어섰다며 경남은 들떴다. 김혁규 경남지사와 김영삼 대통령의 설득작업이 이어졌고 곧 제철소 건설의 꿈이 이뤄지는 듯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제철소 건립은 통상산업부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유는 선대 회장 때와 똑같은 ‘공급과잉’ 문제였다.
실망이 컸다. 하지만 정 회장은 여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가 찾은 새로운 돌파구는 여론이었다.
책에 따르면 “당시 현대제철 유치 캠페인은 1992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선 때보다 더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2007년 가을에 이르러 280만명이 서명하는 전국 캠페인으로 확산됐다. 당시 수거한 서명록 분량은 2.5톤 트럭 3대에 싣고도 남을 양이었다.
마침내 경남과 고로제철소 건설을 위한 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제철소 건설 작업에 착수했지만 이번에는 외부 요인이 발목을 잡았다.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찾아온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2년간의 하동 프로젝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마침내 이룬 철강의 꿈
눈앞에서 꿈을 놓친 정 회장이었지만 제철소 건립만큼은 결코 포기란 없었다. 2004년 포스코와의 경쟁에서 한보철강을 인수하는 등 강원산업, 삼미특수강 등 제철 관련 업종을 끌어들였다.
한보철강의 인수는 고로제철소 건설의 꿈을 당진으로 옮겨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충남도는 현대제철이 일관제철소 1단계로 신청한 당진 송산산업단지 조성계획을 승인했다. 당진군 송산면 일대에 현대家 제철의 꿈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2006년 10월 기공식을 갖고 첫 삽을 뜨고 난 뒤 정 회장은 더욱 바빠졌다. 제철소 건설경험이 전혀 없는 현대차 그룹에 주변에서는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정 회장은 지난 1월 제1고로 화입식을 성공리에 마치며 30년 숙원사업인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의 꿈을 사실상 이뤘다.
제1고로 화입식을 하던 날 정 회장은 정말 감회가 남달랐다. 평소 기자들 앞에서 말을 아끼던 정 회장은 현장에 참석한 기자들에게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다’, ‘오늘 기분이 좋다’며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73세의 회장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표정이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
화입식에서 정 회장은 고로 속 깊숙이 점화봉을 밀어 넣었다. 외국계 관계사 임원들이 시늉만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정 회장에게 화입식은 단순 의례가 아닌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정몽구 회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당초 계획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건설과 조업준비를 진행해 왔다”면서 “현대제철은 고로사업을 통해 제2의 도약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 회장은 철강산업을 갖춤에 따라 자동차 생산의 수직계열화를 사실상 마무리 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대해 ‘정몽구 회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비결은 역시 ‘하면 된다’는 특유의 추진력이다. 2003년 경영계획회의에서 엔진의 연구 개발비의 한도를 없애버린 사건은 그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했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숙원 사업을 뚝심의 정 회장이 이룩한 것이다.
제2고로 준공을 향해 달리고 있는 정 회장은 아버지의 역사를 넘어서는 원대한 포부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