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일해 온 직장에서 은퇴를 맞이 한 한가해 씨. 가족들을 위해 돈벌이에 신경 쓰다 보니 그 동안 여유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에게 잘해 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한 한씨. 은퇴 후 개인시간도 많아졌으니 이제야말로 그 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을 가족들에게 마음껏 베풀어 줄 생각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족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고등학생인 막내아들은 공부하고 학원다니느라 아빠 얼굴 볼 시간도 없고, 대학생인 큰딸은 집에서 얼굴보기조차 힘들다. 아내 역시 친구나 동네 아줌마들과 어울리느라 하루종일 바쁘다. 모처럼 가족끼리 얘기를 하나 싶어 끼어들려면 그 순간 가족들의 대화는 뚝 끊겨버리기 일쑤. 애써 ‘가족외식’이나 ‘가족여행’을 제안해 봐도 다들 “바쁜 데 뭘 그런 것까지 챙기냐”는 식이다.
 
가족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는데, 지금껏 유일하게 ‘아빠 노릇’이라 생각했던 돈벌이마저 끊겼으니 한씨는 더 이상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다.

휴넷가정행복발전소의 김지영 소장은 “대부분의 가장들이 은퇴를 하고 나면 이와 같은 심리 상태를 거치게 된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져 버린 가족의 품. 온라인을 통해 '행복한 아버지 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김 소장으로부터 ‘은퇴 후, 소외된 아버지들의 제자리 찾기’와 관련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는 잘하고 싶은데 가족들이 안 따라준다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20년 만에 만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친구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서로 할 얘기도 없고 어색하기만 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은퇴를 맞은 아버지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20년 만에 만난 친구나 다를 바 없죠.”
 
김 소장은 은퇴 후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같은 집에서 살긴 했지만 가족들과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 심리적인 거리감은 ‘20년 만에 만난 어색한 친구’ 보다 더 멀다.
 
그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자식에 대한 추상적인 모습만을 갖고 ‘내 아이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로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구체적인 모습은 잘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지적한다.
 
“행복한 아버지 학교 수업시간에 과제로 아내와 아이들의 장점을 20가지 정도 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3가지 이상을 생각해 내는 분이 잘 없습니다. 그만큼 가족들에 대해 모른다는 얘기죠.”
 
김 소장이 조심스럽게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을 이어간다. “잘나가는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은퇴를 맞이한 분이셨어요. 은퇴 하고 집에 있다 보니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딸이 사춘기인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많이 힘들어 하는 게 안타까운거에요. 걱정이 되니까 꾸중도 하고, 힘들어도 극복해야 한다고 여러 번 충고도 하고...그런데 지금까지 관심도 없던 아빠가 자꾸 혼을 내니까 딸이 자꾸만 아빠를 피하더래요.”
 
아버지가 잘 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딸과의 사이는 점점 더 안좋아졌다. 설상가상 아내까지 “할 일이 없어서 괜히 아이를 괴롭히냐”며 타박하고 나설 정도. 김 소장은 “마음을 풀고 싶어도 딸아이가 기회를 주지 않아 몹시 힘들어 했다”며 “가족들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아 속상하다고 하소연하는 아버지들이 꽤 많다”고 귀띔했다.
 
“아버지들이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24시간 혹사당하며 일했는데, 이제 시간이 많아졌으니 가족들에게 신경을 써주겠다’는 생각이에요. 모든 가족관계를 자신을 중심에 두고 해석하는 겁니다. 가족들이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가족들이 안 따라준다고 답답해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변할 생각은 못하는 거죠.”
 


◆멋진 아버지로 보이려는 욕심을 버려라

그렇다면 가족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첫걸음은 어떻게 떼어야 하는 걸까. 김 소장은 “멋진 아버지로 보이고 싶은 욕심부터 버리라”고 조언한다.
 
베이비 붐 세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가족의 중심에서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소장은 “특히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아버지의 머릿 속에 있던 꼬마가 아니다"며 "아이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것 보다는, 성인으로 인정해주고 같이 이야기하려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김 소장은 “아무리 한 집안의 가장이라고 해도 항상 강한 모습만 보일 순 없는 법”이라며 “때로는 약한 모습도 보이고 실수도 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더 친근해보일 수 잇다"고 말한다.
 
“행복한 아버지 학교 수강생 한 분은 아들과 여행을 떠나서 바이크를 몰았다고 해요. 물론 처음엔 아들도 따라나서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의외로 아버지가 바이크에 열광하고 또 바이크를 배우면서 실수하는 모습을 보니까 많이 친해졌다고 하더라고요. 무리하게 대화를 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계기를 통해 서로 인간적인 모습을 자꾸 발견하다보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늘어나니까요."
 
김 소장은 “행복한 아버지 학교 수업 시간에는 ‘구나구나 화법’을 권한다”고 힌트를 준다. ‘구나구나 화법’은 가족들과 이야기를 할 때 ‘~구나’를 어미로 끝을 내는 것이다. 표정이 뾰루퉁한 딸아이에게 “너 왜 기분이 안 좋아?” 보다는 “너 지금 기분이 안 좋구나”라고 얘기하는 것이 훨씬 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좋다는 얘기다.
 
그는 “의외로 아버지들 대부분이 한두 달만에 혹은 이벤트 몇 번으로 '해도 안된다'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20년의 거리감을 단 몇달 사이에 메우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어쩌면 2~3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고 꼬집었다.
 
“친구 사이에도 멀어져 있던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데 가족은 ‘가족이니까 다 받아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기 쉽죠. 그게 안되면 더 크게 좌절하고 지레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김 소장이 굳이 ‘공부’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만큼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대개는 ‘가족끼리 다 같이 밥 한번 먹자’는 얘기는 하면서도 ‘다 같이 밥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할까’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5분만 더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고민한다면 어색한 외식 자리도 더 풍부한 대화로 이끌 수 있는 데 말입니다. 공부라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죠.”
 
그는  마지막으로 “모범답안이긴 하지만 가족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가장 중요한 열쇠”라며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어색하더라도 자꾸 마음을 표현하는 게 뻔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