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등기이사 자리에서 물러나더니 지난 3월에는 김상헌 동서그룹 회장이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했다. 같은 달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현대제철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 등이 계열사에서 손을 떼는 등 총수들이 줄줄이 등기이사직을 내려놨다.

등기이사는 총수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보루다. 하지만 최근 총수들이 책임경영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서도 회장 직함은 그대로 유지하며 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논란이다. 이들은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세간의 따가운 눈총만은 피하지 못하고 있다.

◆책임경영 뒷전으로 미룬 총수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지난 3월26일 롯데로지스틱스 비상무이사직에서 사임했다. 신동빈 회장은 3월24일 롯데로지스틱스 비상무이사직과 롯데알미늄의 기타 비상무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신 총괄회장과 신 회장의 사퇴에 대해 롯데 측은 임기 만료에 따른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롯데홈쇼핑 납품비리 사건 등으로 도마 위에 오른 롯데 오너가(家)가 ‘책임경영’은 뒤로한 채 문제가 된 계열사에서 발을 빼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롯데 오너가가 이번에 등기이사직을 내놓은 계열사들은 불공정거래 행위가 거론됐던 곳들이다. 법적 책임까지 져야하는 위치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여지가 있다.

신 총괄회장과 신 회장이 손을 뗀 롯데로지스틱스는 지난해 내부거래비율이 90%가 넘어 ‘일감몰아주기’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롯데로지스틱스 매출의 93%가량이 롯데그룹 계열사 간 내부거래였다. 신 회장이 물러난 롯데알미늄도 지난 2012년 관계사인 롯데피에스넷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거래과정에 끼어들어 통행세로 4년간 총 39억3400원을 챙기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제철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한 부분도 롯데 오너가가 받고 있는 의혹과 유사하다. 그는 지난 3월14일 9년 동안 맡아온 현대제철 등기이사 자리를 내놨다. 사외이사를 포함한 현대제철의 등기임원 9명 가운데 정 회장만 교체됐다.

회사 측은 정 회장의 사퇴가 임기 만료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제철에서 잇따라 발생한 인명사고 등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한 의도라는 추측이 난무한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는 2012년 9월부터 최근까지 가스 누출, 작업 중 추락 등으로 15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다. 현대제철이 작업장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이다. 이 같은 정황이 정 회장의 사퇴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재계 관계자는 “문제가 발생했던 계열사에서 등기이사를 사임한 것은 혹시 발생할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더구나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면서 회장직을 유지하는 건 경영은 직접 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비난했다. 이어 “또 하나, 올해 첫 시행된 총수들의 연봉 공개도 잇단 등기이사직 사퇴 현상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봉 공개 부담돼 물러난 총수들

5억원 이상을 받는 등기임원들의 연봉이 올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재빠르게 자리를 피한 오너들도 있다. 지난해 11월14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이화경 부회장 부부는 자본시장법 개정안 시행을 2주 앞두고 등기임원 자리에서 물러나 눈총을 샀다.

특히 오리온은 실적 악화에도 등기이사 연봉을 높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해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1.88% 감소했음에도 등기이사 1인 평균 보수는 54.88%나 훌쩍 뛰었다.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현숙 새누리당 의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담 회장은 2012년 오리온으로부터 매달 5억1761만원의 급여를 받았다. 이 액수는 오리온 직원 평균 연봉의 180배에 달해 빈축을 샀다.

담 회장과 이 부회장은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지만 회장과 부회장 직위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내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두사람은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사업을 적극적으로 챙길 것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하지만 연봉 공개로 인한 부담을 없애기 위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는 지탄은 여전히 피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7일에는 김상헌 동서그룹 회장도 지주회사인 ㈜동서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김 회장이 등기임원직을 내려놓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른다. 우선 장남인 김종희 전 ㈜동서 상무가 회사에서 손을 뗀 상황에서 김 회장의 결정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완전히 바꾸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와 함께 김 회장 역시 연봉 공개를 하지 않기 위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는 의혹도 여전히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 회장은 지난해 겨우 98만원을 기부해 비난이 쏟아졌다. 올해에만 126억원에 달하는 배당금을 챙기는 등 막대한 배당금 잔치를 벌인 데 비해 상대적으로 액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앞서 일부 오너들이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한 것은 연봉 공개와 혹시 모를 법적 책임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제기된 상황이라 김 회장 역시 책임경영에 대한 의구심이 적지 않다.

이외에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등기이사직을 사퇴하며 ‘백의종군’을 외쳤다. 최 회장은 지난 3월4일 SK㈜와 SK이노베이션, SK C&C, SK하이닉스의 등기이사 자리에서 내려왔다. 김 회장은 지난 3월3일 ㈜한화와 한화케미칼 등 주요 계열사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최 회장과 김 회장은 이미 법적 문제로 각각 실형과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진 상황이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최 회장은 경영의 중심축으로서 상징적 지위인 그룹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김 회장 역시 회장직은 유지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총수들의 보이지 않는 '뒷 경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2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