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한 선비가 살았어요. 이 선비는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낸 훌륭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지요. 그러나 이 선비는 40살이 되도록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우'(牛)자와 '말오'(午)자를 놓고 다투던 아이들이 글을 알려달라며 이 선비를 찾아왔어요. 선비는 코를 '쿨쿨' 골며 자는 척을 했지요. 아이들이 돌아간 후 선비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선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공부를 마칠 때까지 주먹을 펴지 않기로 다짐했죠. 선비는 밤낮 없이 공부에 매진했어요. 이후에는 이떤 글이든 다 읽을 수 있게 됐답니다…."
유치원에 찾아온 특별한 손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김정순씨(63·경북 경주)가 '주먹을 불끈 쥔 선비' 이야기를 들려주자 5~7살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반짝인다. 행여 이야기를 놓칠세라 김씨 곁에 더욱 바짝 붙어 앉는다.
나긋나긋한 김씨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자! 우리 아이들도 주먹을 한번 쥐어보고 각자 무엇을 결심할지 말해 볼까요?" 이야기를 마친 김씨가 질문하자 고사리 같은 손을 불끈 쥔 아이들이 너도나도 "저요!" "저요!"를 외친다.
◆ 삶의 의미 되찾은 '아이들과의 만남'
김씨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운영하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멤버 중 한명이다. 평생을 주부로 살던 김씨는 과거 할머니가 손자·손녀에게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할머니에 지원했다.
"우리 세대의 첫 교육은 할머니 무릎에서 시작됐죠. 할머니들은 손자손녀를 무릎에 앉히거나 눕혀놓고 교훈적인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했어요. 할머니가 '어흥'하고 호랑이 소리를 내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늑대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발을 동동 구르다 잠든 추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이런 따스하고 정겨운 무릎교육이 오늘날 아이들에게도 전해진다면 참 좋겠다 싶었지요."
이렇게 시작해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 준 지도 어느덧 5년째. 김씨는 일주일에 3일, 3곳의 유치원을 돌며 아이들을 만난다. 20분간의 짧은 만남. 처음에는 다소 긴장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일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돼버렸다.
"평소에도 '오늘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즐겁게 해줄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줘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하며 고민합니다. 그렇게 정성들여 준비한 이야기를 아이들이 귀 기울여 들을 때면 가슴이 떨리도록 뿌듯합니다."
아이들이 가져다준 선물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김씨는 이야기할머니가 된 후 제2의 인생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의 삶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허전함과 상실감이 커지죠. 특히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난 후에는 무미건조한 삶의 반복이었어요. 일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우리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잖아요. 이야기할머니를 만난 후에는 일상생활에 생동감이 넘쳐요. 나이를 먹어서도 사회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고 반기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큰 힘이 돼요."
◆'1세대-3세대' 연결해주는 고리
김씨는 무엇보다 '전통교육의 계승자'라는 측면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옛 풍속이 사라지고 시청각교육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우리만의 정겨운 무릎교육을 부활시켜 1세대와 3세대를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이다.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게임과 TV 등 혼자 놀기에 익숙해지면서 감정이 메마르고 있잖아요. 그런 아이들에게 지혜와 사랑이 듬뿍 담긴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祖)-손(孫) 간 소통'으로 보듬어준다는 점에서 우리 이야기할머니들의 역할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유난히 말수가 적은 아이가 나중에는 '할머니'하며 달려와 품에 안길 때 '아, 내가 이 일을 하길 잘했구나' 생각합니다."
이야기할머니는 이처럼 노인세대 문화일자리 창출뿐 아니라 아이들의 정서를 살찌우고 전통문화의 전승을 돕는다. 연륜과 경험을 활용한 옛 이야기로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할머니들. 그들이 놓아주는 '소통의 다리' 위로 미래세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달려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정순씨와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는 전국에 1504명. 이들은 현재 4000여개의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에서 활동 중이다. 이야기할머니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경쟁률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2009년 1기 당시 2대 1에 머물렀던 경쟁률은 지난해 4대 1을 넘어섰고 올해는 6대 1을 돌파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야기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선발과정을 들여다봤다. (관련 문의: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사업단 (080-751-0700))
① 이야기할머니 자격요건
- 만 56세 이상(1958년생)~만 70세 이하(1944년생)로 고정된 직업이 없는 여성
- 지식과 인성에서 기본소양을 갖춘 분
- 자원봉사자로서의 의지와 사명감이 높은 분
- 건강하고 이야기활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높은 분
② 이야기할머니 선발방식
- 서류심사: 지원서에 대한 심사(구비서류, 자기소개서, 봉사활동경력, 봉사 관련 수상 등)
- 면접심사: 이야기할머니 지원동기 적합성, 이야기할머니로서 갖춰야 할 품성, 이야기할머니로서의 활동의지, 언어기본능력 등
③ 양성교육과정
- 이수시간: 총 72시간(신규교육 24시간/2박3일, 월례교육 48시간/당일 6개월)
④ 현장활동
- 1년에 총 30주 활동(1학기 15주, 2학기 15주)
- 1주일에 3곳 유아교육기관에서 활동
- 1회 활동시간: 20분(도입/이야기활동/마무리)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4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