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건물만큼 서울도심의 공간변화를 직접 겪으며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건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유진상가처럼 건립된 이후 국내 도로가 가지는 기능의 순환적·정책적 흐름에 의해 고초(?)를 겪은 건물도 없을 것이다.
사실 현재의 유진상가는 건립 당시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땅 위에 세워진 건물도 아니다. 도로의 순환적 기능을 위해 홍제천을 매립하고 그 위에 건립됐다. 여기에 주위를 둘러싸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었다.
그 이후 유진상가 주변의 교통량은 갈수록 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로 옆에 홍제고가도로가 건설됐다. 그 위로는 서울의 가장 긴 고가도로인 내부순환도시고속화도로(내부순환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5층 높이의 유진상가가 내부순환로 건립에 방해가 되자 4층과 5층을 절단해 그 위에 내부순환로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가도로에 밀려 아픔을 겪은 유진상가는 이제 얼마 후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 일대의 '도시환경정비사업 계획안'이 서울시 건축심의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유진상가가 있던 곳은 홍제천이 복원되고 천변을 따라 업무·판매·문화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미 유진상가 옆의 홍제고가도로는 철거됐다.
◆ 오래된 고가, 추억으로… 서울 공간 재편
유진상가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통중심' 도시에서 '사람중심' 도시로의 정책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편 고가도로가 우리 삶에 끼친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울의 고가도로 철거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2002년 떡전고가도로 철거 이후 마지막으로 철거한 약수고가도로까지 서울시내 고가도로는 총 17개가 철거됐지만 아직도 84개의 고가도로가 남아 있다.
물론 고가 철거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대문고가도로가 오는 2월 철거에 들어갈 예정이다. 아울러 구로, 도림, 서울역, 삼각지, 노들고가차도 등 5개 고가도로의 철거도 적극 검토 중이다.
이처럼 지금은 점차 없어지는 추세지만 고가도로는 차량이 신호대기 없이 신속히 교차로를 이동하게 해주는 도로의 혁명으로 불리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 집중적으로 설치됐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인 시대라 차량위주의 교통정책이 우선시 됐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가도로 시설의 노후화가 진행됐고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이 들면서 철거논의가 시작됐다. 사실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가도로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고가도로를 이용한 빠른 이동과 시간 단축이라는 장점보다 고가도로로 인해 교차로의 상권발전이 저해되고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면서 고가도로의 철거는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빠르게 진행 중이다.
오랜 시간 우리에게 익숙했고 친숙했던 도시의 도로구조물이 어느덧 흉물스러운 구조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의식의 변화는 경제성장과 소득수준, 삶의 질 개선에 따른 변화이기도 하다.
심미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환경 및 도시의 미관이 중요해졌고 그 결과 쾌적한 도시환경과 도시 내에서의 삶의 질이 강조됐다. 즉 도시환경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한 것이다.
3.1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으로 지역 상권이 빠르게 변한 것이 대표적이다. 청계천을 따라 새로운 업무공간과 휴식공간, 문화공간이 형성되고 있다. 도심 속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던 고가도로가 철거된 이후 도시는 탁 트인 밝은 환경으로 거듭났다. 혜화동, 회현동, 광희동, 홍제동 및 신설동 고가도로의 철거 이후 지역의 교통여건 개선 및 지역의 상권변화도 눈에 띈다.
◆ 필요했던 고가, 골칫거리 고가로
고가도로를 설치했던 가장 큰 목적은 병목현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를 '도로의 입체화'라고 부르는데 1960~1970년대에는 주로 고가도로가, 1980년대 후반 올림픽 이후부터는 지하도가 많이 건설됐다. 1호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나 지난 2003년 10월 철거된 청계고가도로 등이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격 고가도로였다.
고가도로는 흔히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성장과 '빨리빨리'가 화두였던 시대에 막힘없이 도심으로 진입하게 해줬고 실제 우리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준 게 사실이다. 고가도로가 우후죽순 들어선 것은 도로교통의 패턴도 한몫했다.
30~40년 전에는 서울의 교통패턴이 오로지 도심, 즉 사대문 안을 향했다. 강변북로·올림픽대로·외곽순환고속도로·내부순환로 같은 도시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라 간선도로의 축이 모두 도심으로 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심 주변에서 병목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해결책이 고가도로 건설이었다.
서울의 도심교통패턴은 88올림픽 이후로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먼저 도시고속도로 등 고기능 도로가 속속 개통됐다. 이에 따라 도심의 교통 몸살이 분산됐고 도심 집중도도 자연히 낮아졌다. 무엇보다 구도심인 사대문 안이 쇠퇴하고 신도심인 강남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도심중심사고가 완전히 깨진 것이다.
구도심에 몰렸던 병목현상이 분산되자 고가도로의 '과투자'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아현고가의 경우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곤 차량 통행량이 뚝 떨어져 '빈 도로'가 되기 일쑤였고 급하게 휘어진 도로의 특성상 과속에 따른 사고도 빈발했다. '혼잡통행료'까지 받아가며 차량의 도심 진입을 막는 판에 '막힘없이 도심으로 진입하게 해주는' 고가도로는 더 이상 원활한 교통흐름의 상징이 되지 못했다.
이와 함께 교통을 바라보는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사람보다 차량이 우선하는 기존 시각에서 보행자와 대중교통을 중시하는 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런 정책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가도로의 철거가 지역상권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서울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