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절한 백제의 한 품은 비단강
비운의 왕국 숨결 오롯이… 가슴 시린 절경들

해질녁 부여 가림성(加林成)과 사랑의나무. 너른 부여와 금강을 배경으로 한 사비백제의 흥망성쇠를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달도 차면 기운다. 달은 기울면서 붉은 빛을 토한다. 스러지는 것들이 아름답듯 기우는 달의 애잔한 여운은 찬연하다. 비운의 왕국, 백제가 그렇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흥망성쇠의 역사, 지배당한 국가는 육신과 정신 모두를 빼앗긴다. 망한 국가가 자신의 혼을 온전히 지킬 순 없다. 또 지배국은 이를 철저히 유린하기까지 한다.


새벽 ‘백마강’ 기운은 차다. 낙화암을 휘감은 얼어붙은 ‘비단강’은 여명 속 잔잔한 은빛을 반사한다. 절벽 끝 강상과 만난 고란사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얼음에 갇힌 유람선은 시절 좋았을 여름을 떠올릴 뿐 얼음을 박차고 나아갈 기운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모가지가 떨어진 백제는 강의 이름마저 농락당했다. 당나라 소정방은 백마의 머리를 잘라 비단강(금강)의 용(백제왕)을 낚았다. 비단처럼 곱던 비단강은 어느새 백마강이 됐고 1500년가량을 그렇게 불렸다. 짐짓 유행가 가락 탓인가. 스스럼없이 백마강이라 말하는 지역민도 많다.

부소산 낙화암 팔자는 기구하다. 소위 삼천궁녀로 함축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낙화암은 그의 타락과 무능함을 강조하는, 승자의 곡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뭇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타사암’(墮死巖)에서 떨어지는 궁녀를 꽃으로 해석한 ‘낙화암’(落花巖)으로 고작 이름만 고쳐지었다.


승자의 입장이라지만 멀쩡한 명승을 두고 떨어져 죽은 바위라니, 세상사 참 짓궂다. 또 왜곡된 삼천궁녀 이야기, 후대에 이를 기린다는 고란사와 궁녀사의 창건 유래도 푸르게 살아있으니 새벽 찬 기운에 가슴마저 헛헛하다.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향한 지난 3일, 새벽녘 고운 눈발이 흩날렸다. 비단강행 버스의 첫 행선지는 고구려 장수왕에 잔뜩 기가 눌린 22대 문주왕이 수도를 옮긴 충남 공주(웅진)다.

◆무령왕릉과 웅진백제

충남 공주 공산성(웅진성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공주가 간직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이다. 공산성은 백제 22대 문주왕이 금강을 북쪽에 두고 언덕 위에 세운 궁성이다. 문주왕은 고구려 장수왕과의 일전에서 전사한 아버지 개로왕을 목도하고 웅진 천도를 결정했다. 공산성엔 한강일대에서 남진 정책을 펴는 장수왕의 강공을 감당할 수 없었던 문주왕의 절박함이 깔려 있다.
공산성(公山城)은 본래 웅진성(熊津城)이었다. 곰나루 또는 고마나루, 다시 말해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의 이름을 땄다. 당초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석성으로 개축했다. 공산성은 64년간 웅진백제의 궁성으로서 수도인 공주를 지켰다. 높지 않은 해발 110m의 능선에 성을 쌓았다.

금강(비단강)과 인접한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 멀리 금강철교와 배다리 흔적이 보인다. /사진=박정웅 기자
궁성이 요새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을까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나 산세가 꽤 있다. 동서남북 장방형의 성곽길이 인상적이다. 오늘날 정문격인 금서루에서 공산성전망대에 오르면 금강, 계룡산,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벽에 솟은 성곽길은 아찔하다. 공산성이 북쪽으로 금강을 방패삼은 천연 요새임을 직감할 수 있다. 언덕길에서 내려다본 만하루 연지의 입은 하마처럼 크다. 토성의 흔적은 광복루와 영동루에서 볼 수 있다. 영동루 또는 진남루에서 바라본 공주 구도심은 옹기종기 예쁘다. 피신한 조선 인조의 이야기가 담긴 쌍수정과 추정 왕궁지는 가족나들이에 좋다.

웅진백제하면 당시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한 25대 무령왕을 빼놓을 수 없다. 공산성에서 내려와 연화문과 청동거울로 치장한 문을 지나 30분 정도 걸으면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이다. 연화문과 청동거울은 무령왕릉의 상징이다.

무령왕릉의 껴묻거리(부장품)인 금제관장식. 매우 얇고 정교해 풍동 없는 외부 환경에서도 미동이 끊임없다. /사진=박정웅 기자
무령왕릉은 묻힌 이가 확인된 보기 드문 고대왕릉이다. 송산리고분군은 문화재 도굴과 약탈이 횡행한 일제강점기에 온몸을 내줘 껍데기만 남은 총 6호분으로 구성됐다. 1971년 여름, 무령왕릉은 6호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됐다. 이 발굴은 달든 쓰든 한국 고고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 적힌 묘비석이 왕릉 내부에서 발견됐다. 사마왕은 곧 무령왕(시호)이다.
도굴의 손때를 피한 수많은 유물이 온전히 출토됐는데 금제관장식(국보 제154호)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이 무려 12점이나 된다. 국보 제154호에서 제165호(나무발받침)까지가 모두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국사 교과서에 등장한 금제관장식은 특히 백제의 화려한 미적 세계를 대변한 걸작이다. 외부의 소리나 미동이 없는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금제관장식의 잔잔한 미동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무령왕릉의 유물 진품은 송산 너머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사비백제

백제 미학을 대표하는 백제금동대향로(왼쪽).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능산리사터의 향로(오른쪽). /사진=박정웅 기자
불교로 정신무장을 한 전륜성왕은 한때 백제 전성기를 이끈 26대 성왕이다. 성왕은 웅진이 비좁아 금강 물길을 따라 사비(충남 부여)로 수도를 옮긴다. 일본이나 중국과의 보다 원활한 해상교류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따라서 웅진보다 너른 들판, 서해와 더 가까우면서 드넓은 부여의 금강은 사비시대를 연 전륜성왕의 포부를 담기에 족했다. 성왕은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고 중흥을 꿈궜다. 부소산성과 관북리(추정 궁터), 국찰인 정림사, 궁의 연못인 궁남지가 일직선 축을 이룬 부여는 한반도의 첫 계획도시였다.

성왕의 비운은 역설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라는 한국 고고미술사의 걸작으로 이어졌다. 동맹을 깬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참극을 맞이한다. 분리된 머리와 몸은 각각 신라와 백제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위덕왕은 슬픔과 충격의 도가니에서 3년간 왕위 승계를 거부했다. 그동안 목 없는 선왕의 원혼을 살핀 것 중 하나가 백제금동대향로다.

재해석한 능산리사. 이 예상도의 기단과 배경인 능산리사터의 기단을 일직선상에 두면 1500여년 전 능산리사의 위용이 드러난다. /사진=박정웅 기자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웅진백제의 무령왕릉처럼 우연한 기회에 세상의 빛을 봤다. 능산리고분군 주차장 건설 중 부여나성 바로 아래쪽에서 발견됐는데 그 터가 곧 능산리사지다. 오랜 세월 진흙에 묻혀있어 몸을 온전하게 보존했고 영조어진(초상화)과 함께 국외 반출금지 문화재로 부여와 백제의 자랑거리가 됐다.
본래 국내든 국외든 출토지역인 부여를 떠날 수 없는데 딱 한번 금강을 떠난 적이 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개장 기념과 관련한 것으로서 당시 무수한 이야기를 낳았다. 그만큼 중요하신 몸이니 친견하려면 122년 남부여의 고도로 와야 한다는 뜻이다.

능산리사터와 부여나성을 따라 걷는 사비길에서의 조망. 관산성 전투가 있었던 충남 논산 뱡향으로 향하는 제4번 국도가 나성을 가로지른다. /사진=박정웅 기자
능산리고분군은 사비백제의 왕릉군이며 능산리사지는 이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특히 성왕과 관계가 깊은 걸로 추정된다. 부여나성을 따라서 부여의 걷기여행길인 사비길을 오르면 전륜성왕의 비운이 국도 4호선을 가로지르는 토성에 꼬리를 문다. 산을 넘는 길,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낮은 탄식이 절로 나오는 길이다. 또 하나의 산을 넘으면 백제금동대향로 진품이 기다리는 부여국립박물관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 또 다른 백제 미학의 걸작으로 122년 사비백제의 고도인 부여의 한복판에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부여의 한복판에 솟은 석탑을 마주하면 먼 지난날로 향하는 나래가 펴진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부여의 가장 오래된 백제 건축물로 호류사탑을 비롯한 일본 석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 역사기행에 획을 그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이자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은 이 탑을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유치하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 미학의 상징물로 꼽았다.
◆미륵사탑과 사비백제 후기

외부 공개가 임박한 미륵사지석탑(서탑). 복원 공사로 구조물 내부에 있고 전체적인 조망은 오는 3월 가능하다. /사진=박정웅 기자
이 정림사탑의 원형은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목탑을 만드는 방식을 취했고 보다 세련된 정림사탑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시멘트로 덧댄 안타까운 흔적은 석탑의 해체보수와 복원 작업으로 벗겨냈다. 오는 3월이면 드디어 바깥 세상에 나서는데 석탑을 둘러싼 공장 같은 구조물, 혹은 겨울 칼바람 탓일까.
유홍준이 그토록 찬미한 “압도하는 스케일의 중량감, 적당한 비례의 배흘림기둥, 정연한 체감률로 안정감을 주는 중층구조”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내 “백제인들의 우아한 세련미”까진 나아가지 못했다.

또 부여가 낳은 시인 신동엽이 <금강>에서 말한 “그날은 / 저 탑날개 / 이끼 위 / 꽃잠자리가 / 앉아 있었다”라는 애틋한 연인의 ‘마한, 백제의 꽃밭’ 서정도 돋지 않았다. 꽃 피는 봄, 오랜 시간을 덮은 뚜껑이 열리면 다시 찾아볼 일이다.

미륵산(용화산) 남쪽에 자리한 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로 꼽힌다. 미륵산에서 마를 캤다는 서동(맛동, 훗날 30대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얽힌 곳이다. 무왕은 이 금마면과 왕궁면(왕궁리) 일대에 두 도읍 청사진을 그렸다. 기존 수도인 사비에다 이곳을 더해 2곳의 도읍을 둔다는 전략이다.

왕궁리유적과 왕궁리 5층석탑.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사비백제의 정림사탑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박정웅 기자
금마의 미륵사를 국찰로 여긴 무왕은 가까운 왕궁리에 왕궁을 지었다고 전한다. 지명과 같은 왕궁리유적이다. 발굴 결과, 장방형의 궁장에서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확인됐다. 남쪽에는 정사를 돌본 건물이, 북쪽에는 후원이 배치된 흔적이 있다. 빈 터를 쓸쓸히 지키는 왕궁리 5층석탑은 고려 건축물인데 정림사탑이 저절로 떠오른다. 무수한 시간이 흘렀어도 지역에서 백제가 꽃피운 예술혼은 죽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공식적인 백제사는 없다. 안팎에서 이를 기록한 정사나 야사, 또는 한중일 삼국의 역사를 종합해야 한다. 승전국의 입맛으로 쓴 자료도 되짚어봐야 백제의 퍼즐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이야기엔 늘 ‘추정’이라는 단서가 따라붙는다. 유홍준은 그런 백제 역사기행을 상급자 코스로 간주했다. 많지 않은 돌덩어리 또는 잔편에서 피고 진 역사의 흐름을 읽어야 해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8호(2018년 2월21~2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