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면식갤러리에 올라온 글에 여전히 댓글이 달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폭염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려는 욕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의 합격 기원,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홍보, 전 여자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 어떤 범주에도 묶이지 않는 이른바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댓글이 1만5754개? '햄맛'이 뭐길래…
30일 오후 2시30분 기준 이 글의 댓글수는 1만5754개. 지난 27일 오후 4시 1만5742개였는데 그새 12개가 더 달렸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2006년 9월1일 작성된 글에 아직까지 댓글이 달리는 것일까.
글의 제목은 ‘삼양라면 맛에 대한 글이 있어서 생각났는데…’다. 글쓴이는 자신이 라면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그런 글쓴이가 몇 년 전에 삼양라면을 먹었는데 햄맛이 나길래 삼양라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단다. 옛날 삼양라면에 비해 햄맛이 너무 강해서 맛이 이상하니 햄맛을 빼달라고 요구했다는 것.
글쓴이는 그 이후 한참 뒤에 삼양라면을 사먹었는데 햄맛이 빠져서 맛이 훨씬 좋아졌다고 말한다. 이어 문득 생각나서 이 얘기를 써봤다며 삼양라면이 다른 라면보다 칼로리가 낮다는 말로 글을 마친다.
이 글은 인터넷에서 이른바 ‘삼양라면 햄사건’으로 불리며 네티즌들의 분풀이 장소가 됐다. 처음에는 삼양라면 특유의 ‘햄맛’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괜한 오지랖으로 맛을 망쳤다며 비난을 받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누구든 찾아와서 아무 댓글이나 남기는 일종의 인터넷 ‘대나무 숲’이 된 것이다.
댓글의 면면을 보면 실소가 터진다. “아 갑자기 빡치네” “그냥 심심해서 놀러왔다” “세상에 돌릴 수 없는 것 세가지: 시간, 죽음, 그리고 삼양라면 햄맛 이 XX야” “날이 왜 이리 덥냐 나쁜 XX야” “잘 지냈냐 XX아? 아픈 덴 없고? 미친XX? 잘 먹고 다녀 요즘 더우니까” “내년 안에 취직하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소희야 보고싶다” “로또 사게 기운 좀 나눠줘라” 등이다.
“아놔 오늘 삼양라면 먹으려고 봉지 뜯는 순간 이거 생각나서 욕하러 왔다 이 XX야 라면은 먹고 다니냐?”
◆삼양식품 "연구소에서 매년 맛을 개선했을 뿐"
이유없는 분노, 무료함, 불볕더위, 애증의 안부인사,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 로또 당첨 기원 등등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도 있지만 글과 무관한 내용의 댓글도 다수다. 이들이 욕설을 남발하는 건 삼양라면의 변한 맛 때문은 아닌 듯하다. 문득 생각난 김에 보러 왔다가 지금껏 댓글이 달리는 사실이 재밌어서 몇자 덧붙이는 게 아닐까.
그런데 정말 삼양라면의 햄맛은 이 네티즌의 요구 때문에 사라졌을까. 삼양식품 관계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삼양식품 측도 이 게시글을 알고 있고 ‘삼양라면 햄사건’이 논란 아닌 논란으로 번지자 ‘삼양라면 맛의 변천사’라는 자료까지 제작했다.
삼양식품 측은 “네티즌 한명의 의견 때문에 맛이 바뀌는 일은 없다”면서 “삼양식품 연구소에서는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하며 매년 맛을 개선해왔다”고 밝혔다.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는 만큼 제품을 계속 리뉴얼한다는 것이다.
삼양식품은 1989년 발생한 ‘우지파동’으로 1994년부터는 팜유를 사용해서 라면을 튀기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의 맛이 확연히 달라진 건 이때부터다. 1997년에는 삼양라면에서 햄 후레이크가 빠졌고 2006년 정부 정책으로 MSG와 나트륨 함량을 줄였다. 직접적으로 햄향이나 맛을 줄인 것이 아니지만 햄 후레이크가 없어지고 짠맛이 덜해지면서 소비자들은 햄맛을 뺐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논란의 글이 작성됐고 이후 햄맛 논란이 지속됐다. 삼양식품은 2016년 ‘햄맛을 살려달라’는 소비자의 의견을 반영해 다시 햄맛을 강화하고 햄 후레이크를 추가하는 등 현재의 삼양라면 맛으로 리뉴얼했다.
이 글이 작성된 게 2006년 9월이다. 그동안 월드컵과 지방선거를 3차례씩 치렀고 대통령도 두번이나 바뀌었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네티즌의 입길에 오르내렸으니 어찌 보면 오랫동안 삼양라면을 홍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여전히 이 글이 네티즌의 관심을 받는 것에 대해 “계속 삼양라면이 회자되는 거니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욕을 먹는 글쓴이에게 선물이라도 증정할 의사가 있냐는 말에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