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북한 선박 삼척항 입항 은폐 조작 진상조사단이 지난달 24일 강원도 동해시 해군 제1함대사령부 앞에서 북한 목선의 현재 상태를 묻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김경목 기자
자유한국당 북한 선박 삼척항 입항 은폐 조작 진상조사단이 지난달 24일 강원도 동해시 해군 제1함대사령부 앞에서 북한 목선의 현재 상태를 묻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김경목 기자

“어디서 왔나?”
“북한에서 왔다.”
“서울에 사는 이모와 통화하고 싶으니 휴대전화를 빌려달라.”
2019년 6월15일 아침 6시50분쯤. 강원도 삼척항 부두에선 북한사람 4명과 남한주민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북한사람들은 1.8톤짜리 자그마한 목선(나무배)을 타고 거친 동해를 800㎞나 항해한 뒤 무사히 삼척항에 들어왔다. 한국정부는 4명 중 2명을 지난달 18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보냈고 귀순 의사를 밝힌 나머지 2명만 남겨뒀다.

◆북한 목선의 ‘정박귀순’, 뻥 뚫린 경비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그 목선에 무장한 북한군이 타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또 꼼꼼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북송한 2명이 간첩 임무를 띠고 왔었다면….

참으로 상상하기도 거북한 일이다. 하지만 ‘정박귀순’과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북한 가정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재구성해보자.

자그마한 북한 목선은 지난달 12일 밤 9시쯤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뒤 사흘 동안 한국 영해에 머물다 15일 오전 6시10분쯤 삼척항에 들어왔고 12분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배회했다. 밤에 움직이다 한국 해군에 발각되면 총격을 받을 수 있기에 먼바다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한국 어선인 듯 당당하게 삼척항으로 들어왔다. 한국의 해군·육군·해경의 ‘3중 감시망’이 여지없이 농락당한 셈이다.


2012년, 22사단 DMZ에서 날이 새길 기다려 남쪽으로 넘어온 대기귀순과 판박이였다. 해군은 15일 밤 바다 파도가 1.5~2m나 돼 목선(길이·너비·높이: 10.0×2.5×1.3m)을 레이더로 잡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제의 목선이 삼척항 부두에 접안한 뒤 선원 4명 중 일부가 배에서 내려 약 30분 동안 이곳저곳을 활보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목격한 현지 어민들은 ‘그들은 깔끔한 옷차림이었고 어민이 아니었다’, ‘인민복과 특수부대가 지급하는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었고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2명이었다’,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같은 반응이었다. “이런 식이면 불안해서 살 수 있겠나”라는 말을 삼키면서 그 어민이 신고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송나라 육유의 시

북한 목선의 ‘정박귀순’을 지켜보면서 송나라 육유의 시가 떠올랐다. 북송의 관리를 하면서 한시를 1만~2만수나 지은 그는 85세에 죽으면서 여섯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유언을 시로 남긴 유시(遺詩)다.

示兒(시아-아이에게 보이다)
死去元知萬事空(사거원지만사공) 但悲不見九州同(단비불견구주동)
王師北定中原日(왕사북정중원일) 家祭無忘告乃翁(가제무망고내옹)
죽으면 만사가 헛되다는 것을 본디 알지만 구주가 하나 되는 것을 못 보는 게 슬플 뿐
천자 군대가 북쪽 중원을 평정하는 날 집안 제사 때 아비에게 알리는 일을 잊지 말아라

육유는 이 유시를 남기기 전에 관산월(고향산천의 달)이라는 칠언배율도 남겼다. 이 가운데 셋째, 넷째 구는 다음과 같다.

朱門沈沈按歌舞(주문침침안가무) 廐馬肥死弓斷弦(구마비사궁단현)
권력자들 집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니 마구간 말들은 살쪄 죽고 활은 줄이 끊어졌구나

육유는 죽으면서까지 송의 국토를 회복하길 기원했지만 역사는 그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69년 뒤인 1279년, 남쪽으로 쫓겨 간 송은 몽골의 원에 정복돼 역사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남송의 유민 임경희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來孫却見九州同(내손각견구주동) 家祭如何告乃翁(가제여하고내옹)
후손들은 오히려 원이 9주를 통일하는 것을 보았으니 제사 지낼 때 아비에게 무엇이라 고했을까

정박귀순을 속 터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일본의 ‘모친 유기’와 오규 소라이

오규 소라이는 일본 근대화에 사상적 주춧돌을 놓은 사람의 하나로 ‘정치를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야나기사와 요시아스 아래에서 이름 없이 지내던 학자 시절에 발생한 ‘모친 유기’ 사건에서 정치의 본질을 보았다. 사정은 이랬다.

야나기사와의 영지인 가와고에 출신의 한 사람이 흉년에 기근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아내와 헤어지고 머리를 깎은 뒤 도입(道入)을 자처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떠돌아다니다 모친마저 버리고 에도로 도망쳤다. 그 모친이 가와고에로 송환된 뒤 그의 아들이 잡혀 처벌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소라이의 대책은 이런 것이었다.

“부모를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기근으로 어쩔 수 없이 모친을 버렸다고 처벌하게 되면 다른 영지에서도 따라 할 것이다. 모친 유기가 생기는 것은 우선 지방관의 책임이고 그 위로 중신의 책임, 나아가 더 책임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입의 잘못은 오히려 매우 가벼운 편이다.”

소라이는 도입이 모친을 유기한 것은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못해 기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 만큼 도입을 처벌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정자들이 문제의 근원인 기근 해결에 더 중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야나기사와 책임까지 거론했으니 자칫 괘씸죄에 걸릴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신임을 받아 중용됐다. ‘정치 부재’ 상황에서 ‘정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잘못된 처벌 대신 올바른 대응방안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육유의 유시와 소라이의 ‘모친 유기’ 대응은 ‘정박귀순’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 논란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정치의 근본은 국민들을 외침에서 막아주고(전쟁 억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의식주의 경제와 국방의 안보를 챙기지 않으면 나라는 다스려지지 않고 혼란스러워지게 마련이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지 않고 미봉책만 되풀이한다면 그 후과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99호(2019년 7월2일~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