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보스톤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고(故) 이병철 회장. /사진=삼성그룹
1982년 보스톤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고(故) 이병철 회장. /사진=삼성그룹

미혹을 넘은 현명한 선택만이 살길
리어왕과 오셀로가 한국 정치꾼에게 주는 채찍
#1. 로알드 달의 고조부 헤셀베르그 목사


1822년 성령강림절(부활절 50일 후 일요일) 노르웨이 웨스트민스터 팔리어먼트 가의 한 예배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젊은 헤셀베르그 목사의 성령강림 설교가 한창 무르익을 때 불이 났다. 공포에 빠진 교인들이 문으로 달려갔지만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문이 안에서 당겨 여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열 수가 없었다. 그 떼죽음의 지옥에서도 몇몇 사람이 살아남았다. 성경책을 제단 위의 높은 유리창까지 쌓은 뒤 몸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라는 헤셀베르그 목사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 참사를 대서특필했던 유럽 신문들은 젊은 목사의 냉철한 판단력을 높이 칭송했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무리에 휩쓸리지 않은 진취적인 시대의 영웅이자 독립적인 인간이며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훗날 노르웨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모든 공공기관 건물 문이 밖으로 열리게 하는 건축법을 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헤셀베르그 목사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 등으로 유명한 천재 이야기꾼 로알드 달의 고조부다. 그는 고조부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으나 고조부의 위기관리 능력과 꽉 막힌 현실을 바꿔내는 능력을 DNA로 물려받았다. 7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그들의 꿈을 키워주고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2. 리어왕과 오셀로 그리고 맥베스

“할 말이 없으면 받을 것도 없다.”(Nothing will come of nothing.) 리어왕은 그가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 코델리아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코델리아가 “저는 아버님을 자식의 의무로써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I love your majesty According to my bond; nor more nor less)라며 “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한 데 대한 것이다.

현명한 왕이었던 그는 첫째 딸과 둘째 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막내딸 코델리아에게 주려던 권력과 재산을 두 딸에게만 주었다. 결과는 두 딸에게 버림받고 광야로 쫓겨나 미치광이가 되었다. 프랑스 왕비가 된 막내딸의 도움으로 막판에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감옥에서 목 졸려 살해됐고 리어왕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이 터져 죽었다.

유명한 장군이었던 오셀로는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운 데스데모니아와 행복하게 결혼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 기수였던 이아고의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 아내를 살해했다. 사람 마음을 사정없이 농락하고 먹어치우는 파란 눈의 괴물인 의심과 조금만 핏속에 작용하면 유황광산처럼 불타오르는 억측 그리고 저절로 생기는 괴물인 의처증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오셀로는 이아고에 농락당한 것을 안 뒤 이아고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스코틀랜드의 맹장이었던 맥베스는 마녀의 망언을 믿고 자신과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던컨 왕을 살해한 뒤 왕이 됐다. 또 자신과 친한 장군 밴쿠오도 죽였다. “그가 왕이 되지 못해도 자손 대대로 왕을 낳을 것”이라는 망언을 믿은 탓이었다. 

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그의 부인은 미쳐서 죽었다. 맥베스도 ‘여자 몸에서 태어난 자로 맥베스를 해칠 자 없다’, ‘버냄 숲이 쳐들어오기 전에는 맥베스는 영원불패다’라는 망언에 의지해 버텼지만 끝내 맥더프에게 살해당했다.

리어왕과 오셀로는 얇은 귀 때문에 자신은 물론 죄 없는 백성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았다. 맥베스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마녀가 부추긴 욕망으로 파멸했다. “많은 사람이 나쁘다 해도 반드시 살피고 좋다고 해도 살피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었다.

#3. ‘도쿄선언’과 삼성반도체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은 1983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초고밀도집적회로(VLSI)에 대규모로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은 물론 대한민국과 일본, 미국 등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도쿄선언이다. 당시 삼성은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 때였다. 

반도체산업을 선도하던 인텔은 도쿄선언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다. 다음 달 기흥에서 반도체 공장 기공식을 할 때 참석했던 임직원도 불안감에 떨었다. “잘못하면 삼성그룹 절반 이상이 날아갈지 모른다”(이병철 회장의 훗날 인터뷰)는 우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삼성이 아니면 이 모험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며 꿋꿋하게 밀고 나갔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삼성전자의 2018년 매출액은 243조원으로 한국 GDP의 12.8%나 됐다. 당기순이익은 44조원이었다. 2019년에는 반도체 경기부진으로 매출액이 231조원으로 소폭 줄고 당기순이익은 22조원으로 줄 것으로 예상된다. 여전히 한국 경제를 ‘30-50클럽’으로 이끈 기관차임에 틀림없다.

이병철 회장과 삼성이 그때 반도체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삼성은 어떻게 반도체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리더의 올바른 결단이 기업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4. 국민 내세우며 국민 외면하는 정치

대한민국 국회는 ‘식물국회’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물리적으로 치고받는 ‘동물국회’를 지양하기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문은 열었으되 민생을 위한 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본질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한 꼼수에 집착해 ‘살리는 정치’보다 ‘죽이는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안전을 지켜 아무런 걱정 없이 잘살도록 하는 게 책무다. 지도자는 리어왕이나 오셀로, 맥베스처럼 잘못된 남의 말에 좌우돼서는 안된다. 이병철 회장처럼 먼 앞날의 변화를 내다보고 그에 맞춰 과감한 투자로 준비해야 한다. 코앞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적극 설득하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헤셀베르그 목사처럼 위기상황에서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타개방안을 찾아내 목숨을 지켜야 한다.

황금돼지해가 저물고 흰쥐해가 열리고 있다. 2020년 경자(庚子)년 4월에는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앞으로 4년은 물론 그 이후까지 정치를 제대로 이끌어갈 올바른 정치가를 뽑는 과제가 주어졌다.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거나 남을 헐뜯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꾼들에게 표를 준다면 식물국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선 국회의원을 제대로 뽑아야 하고 올바른 정치가를 선출하는 것은 이 나라 주인인 유권자들의 몫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25호(2019년 12월31일~2020년 1월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