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축구사의 산 증인인 보비 찰튼 경이 최근 치매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로이터
지난달 2일(한국시간) 잉글랜드 축구계에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잉글랜드 축구사의 산 증인인 보비 찰튼 경이 치매에 걸렸다는 보도가 '텔레그래프'로부터 나와서다.
찰튼 경은 국제축구연맹(FIFA)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개최국 잉글랜드의 우승을 이끈 전설 중의 전설이다. 클럽 커리어에서는 비극적인 뮌헨 참사에서 생존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다시 유럽 최고 수준의 구단으로 끌어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평소 후배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자주 올드 트래포드를 찾던 찰튼 경의 치매 발병 소식은 잉글랜드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찰튼 경은 1966년 잉글랜드 대표팀 멤버 중 치매에 걸린 다섯번째 인물이다. 앞서 그의 형이었던 잭 찰튼을 비롯해 마틴 피터스, 레이 윌슨, 노비 스틸스가 치매로 고통받았다. 스틸스가 지난 10월 세상을 떠나며 이들 다섯명 중 생존자는 찰튼 경만 남게 됐다. 잉글랜드 축구에 한없이 빛나는 영광을 안겼던 이들이 차츰 기억을 잃어가며 말년을 분투 속에 보내고 있다. 잉글랜드 축구계가 다시 한번 '치매', 더 나아가 '뇌손상'이라는 비극 앞에 직면했다.

공놀이가 치매를 부른다?… 미국 이어 영국서 '연구 돌입'

구기종목이 프로 선수들의 뇌손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은 미식축구를 중심으로 먼저 제기됐다. /사진=로이터
현역 시절 최고의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이들이 치매로 고통받는 건 비단 '1966년의 11명' 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독일 최고의 공격수이자 바이에른 뮌헨의 코치로 활약했던 게르트 뮐러도 치매로 힘겨운 말년을 보내는 사실이 최근 전해졌다.
축구선수들의 뇌손상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헤더다. 헤더는 축구선수들에게 있어 일상과 다름없다. 손과 팔을 제외하고 모든 부위가 사용 가능한 축구에서 머리는 좋은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들에게 또 하나의 특별한 무기로 사용된다. 하지만 정작 지속적인 헤더가 사람의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스포츠와 뇌손상의 연결고리가 처음 공론화된 건 미국이었다. 나이지리아계 법의학자 베넷 오말루 박사가 지난 2002년 한 전직 미식축구선수를 부검하는 과정에서 '만성 외상성 뇌병증'(Chronic Traumatic Encephalopathy, CTE)으로 불리는 두부 손상 증세를 확인했다. 오말루 박사는 동료 병리학자들과 함께 지난 2005년 '미식축구리그(NFL) 선수들의 CTE'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내고 선수들의 안전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다.

NFL은 이에 대해 부정하며 연구 발표 철회를 요청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10년여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결국 지난 2010년대 초반 미식축구가 선수들의 뇌건강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전직 NFL 선수 5000명은 지난 2012년 '경기 중 뇌손상 위험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리그에 소송을 제기, 미 연방법원은 NFL 측이 이들에게 총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웨스트브롬위치 알비온의 홈구장 더 호손스에 새겨진 전설적인 공격수 제프 애스틀. 애스틀은 지난 2002년 치매 투병 중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로이터
비슷한 시기 잉글랜드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현역 시절 웨스트브롬위치 알비온의 전설적인 공격수이자 '헤더의 명수'로 불렸던 제프 애스틀은 지난 2002년 59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사망 5년 전부터 나타난 퇴행성 뇌질환과 치매로 고통받다가 딸의 집에서 숨이 막혀 세상을 떠났다.
영국 'BBC'에 따르면 당시 애스틀을 부검한 의사는 그의 사인을 '산업재해'로 표현하며 반복적인 헤더가 죽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계에서는 지난 2014년 '제프를 위한 정의'(Justice for Jeff)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전히 헤더의 위험성에 대한 정확한 조사나 인지가 이뤄지지 못했다.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계속된 헤더가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축구당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일반인보다 치매 확률 5배… 공이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축구공의 무게와 상관없이 헤더의 반복성이 선수들의 뇌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사진=로이터
축구로 인한 뇌손상을 가죽공 시대의 아픈 유산으로 여길 수도 있다. 초창기 축구공은 쇠가죽 등으로 만들어져 질기고 단단하면서 무거웠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점차 축구공의 무게도 가벼워졌고 재질도 보다 탄력이 우수하면서 부드러운 폴리우레탄 등이 사용됐다. 지난 2018년 FIFA 러시아 월드컵에서 공인구로 사용됐던 아디다스 '텔스타 18'의 경우 무게가 430g에 불과하다.

하지만 최근에 이뤄진 여러 연구는 전현직 축구선수들에게서 발생하는 뇌손상의 원인을 '공' 대신 '헤더'로 지목한다. 공의 무게와는 상관없이 머리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충격이 선수들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의 윌리 스튜어트 박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거 프로축구 선수로 활동했던 이들은 일반인보다 뇌질환 발병 확률이 3.5배 가량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파킨슨병 발병 확률은 2배, 알츠하이머 발병 확률은 무려 5배나 높았다.


스튜어트 박사는 이와 관련해 영국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치매는 무거운 가죽 축구공으로 헤더를 했던 예전 축구선수들에게나 관련된 문제라는 오해가 있지만 현대의 인조가죽 축구공은 더 빠르게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 속도도 잘 줄어들지 않는다"며 "오늘날의 축구선수들이 1970년대 가죽공으로 축구를 하던 선수들보다 노년에 더 큰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리버풀 호프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최근 영국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호프대학 연구팀은 18~21세 축구선수들을 3그룹으로 나눈 뒤 각각 단단한 공과 덜 단단한 공, 그리고 헤더 시늉만 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공의 강도와 상관없이 헤더를 실제로 한 그룹의 80%가 실험 이후 진행된 인지능력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현대축구로 넘어오면서 헤더의 중요성과 횟수가 늘어난 점도 문제다. 스튜어트 박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 이전에 개최된 월드컵의 경우 경기당 평균 70회 미만의 헤더가 이뤄졌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월드컵에서는 평균 수치가 20회 이상씩 늘어났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경우 경기당 평균 105회(역대 최다)의 헤더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헤더를 통한 뇌손상 위험이 수치화돼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기란 쉽지 않다. 축구 역사와 함께하다시피 했던 헤더를 단기간에 규제할 방법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김용재 가톨릭대 은평성모병원 신경과 교수는 이와 관련해 "(축구는) 미식축구처럼 보호장구 자체가 규정화된 것과 사례가 다르다"며 "절충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직까지는 현장에서 조심하는 것 말고는 명확한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내 헤더 제한, 어디까지 왔나

영국 내에서는 유소년 선수들을 중심으로 훈련 과정에서 헤더를 줄이는 방식으로 헤더 제한이 추진되고 있다. /사진=로이터
잉글랜드 축구계는 일단 유소년 선수들의 훈련 과정에서 헤더를 자제하는 방향으로 규제가 추진되고 있다.
FA는 올해 초부터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 영국 내 4개의 축구협회 중 FA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축구협회는 11세 이하 유소년 선수들이 더 이상 훈련 과정에서 헤더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적용했다.

새 지침은 11세 이하 선수들이 훈련 과정에서 헤더를 절대 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이후 12세 이하 단계에서부터 조금씩 훈련 중 헤더가 가능해지지만 횟수나 훈련 시간은 엄격히 제한된다. 일례로 영국 내 12세 이하팀 코치진은 한달에 단 한번만 헤더 훈련 과정을 포함시킬 수 있으며 훈련당 헤더 횟수도 선수당 다섯번을 넘길 수 없다.

4개 축구협회 중 유일하게 이를 시행하지 않은 웨일스축구협회의 경우 연말까지 나오는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해당 지침 적용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성인 단계에서의 헤더 규제도 논의되고 있다. '꺽다리 공격수'로 유명했던 해설가 피터 크라우치(201㎝)는 현역 시절 지속적인 헤더를 한 탓에 지금까지도 매년 치매 검사를 받고 있다고 고백했다.

데이비드 모예스(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슬라벤 빌리치(웨스트브롬위치 알비온), 딘 스미스(애스턴 빌라) 등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을 이끄는 감독들은 입을 모아 "헤더가 선수들에게 치매를 유발한다는 확실한 연구가 나온다면 마땅히 금지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PFA)는 헤더에 따른 뇌손상 연구에 대해 지원하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스튜어트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위험은 20대에 발생하는데 질병은 60~70대에 나타난다. 최대한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며 "훈련에서 헤더를 금지한다면 주말 열리는 경기에서 (헤더를) 하더라도 (뇌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재 교수 역시 "(뇌손상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적된 결과로 나타난다. 운동선수들이 활동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건 40대 전까지 아니겠나"며 엘리트 축구선수들이 훈련 과정에서 헤더를 최대한 자제할수록 좋다고 지적했다.

축구 역사에서 헤더는 경기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에 자주 등장했다. 헤더골과 경합에 능한 선수들은 '공중의 지배자', '황금의 머리'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돼왔다.

최근 나온 여러 연구 결과는 이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선수들이 처한 진짜 위험을 가려버린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영국 축구계가 이른바 '헤더의 공포'로 동요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