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을 사거나 분양받는 수요자는 거의 ‘불쌍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분양을 받으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집을 사지 않고 부양가족도 많은 사람만 가능하다. 4인 가족의 최대 청약 가점이 69점인데, 좋은 곳에 당첨 받으려면 이 점수도 안심하지 못한다. 요즘은 84점 만점도 등장할 정도니까 말이다.

집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가. 서울에서 유주택자가 집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갈아타기나 교체 수요만 있을 뿐인데, 대출을 받으면 6개월 내 처분하고 입주까지 마쳐야 한다. 주택시장은 이미 실수요 시장으로 재편된 지 오래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주택 투기꾼은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대부분 한푼 두푼 모아서 작은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의 서민과 중산층이다. 요새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집안이 있는가. 대출 옥죄기를 놓고 말들이 많다. 많은 전문가들이 투기적 수요는 차단하고 실수요는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대출을 받아 집 사는 사람 가운데 전통적인 의미의 투기적 수요는 없다. 일부 있다고 해도 다 투자와 실수요를 겸한 것이다. 한마디로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선량한 실수요자다. 개인으로 보면 안쓰럽고 불쌍해 보인다. 하지만 이 실수요가 집단화되면 순수성을 잃는다. 거대한 투기적 광풍이 된다. 즉 실수요가 개인에 그치지 않고 집단으로 바뀌면 투기적 광풍이 일어난다. ‘영끌’ ‘빚투’는 탐욕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나올 수 있다.


가계부채의 폭증은 경제시스템을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다. 현재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상위 수준이다.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출 규모를 축소하고 적절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러다가 다 죽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이 당하는 ‘금융 억압’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대출을 옥죄는 금융당국에 대해 저항군식 스펙트럼을 갖는다. 경제는 양면의 성격을 갖는다. 특히 대출 문제는 양가적이다. 동일 대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한다. 개인 입장에서 앞으로 직장 다닐 날도 많고 충분히 갚을 수 있는데 국가에서 빚내기를 왜 통제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한다. 막상 규제를 당하는 입장이 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경제 전체 시각에서 보면 냉정해진다. 누구나 위험수위에 도달한 가계부채 문제를 걱정한다.

이런 이중성은 경제학적으로 ‘구성의 오류’와 맞물려 있다. 즉 개인적으로 타당한 논리지만 전체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개인 복리를 합치면 반드시 공동체의 복리 총합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대출 문제는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이냐, 국가경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 다르다. 참으로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다. 이럴수록 중심 잡기가 중요하다. 당신은 경제학을 배운 사람인가. 그렇다면 경제를 한쪽만 바라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