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처지가 달라지면 생각도 바뀐다. 사람은 한쪽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어떻게 ‘배치’(Agencement) 되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배치를 다시 하게 되면 존재 자체가 다른 것으로 재구성된다. 인간은 환경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사유는 존재에 의해 구속(사유의 존재 구속성)된다.
부동산 시장으로 가보자. 무주택자는 집을 사면 그때부터 집값 상승을 염원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집값 상승 재료에 예민해진다. 반대로 살던 집을 팔면 집값 하락을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집값 하락 뉴스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정부가 침체된 부동산경기를 살리기 위해 정책을 내놓으면 유주택자는 “이제 집값이 오를 테지”라며 잔뜩 기대한다. 반대로 무주택자는 상승하더라도 일시적인 상승에 그칠 것으로 생각한다.
요즘 아파트값이 크게 오르면서 종합부동세를 비롯한 보유세가 급증했다. 이에 대한 시선도 주택 소유 여부에 따라 다르다. 다주택자들로선 정부가 보유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탄’을 퍼붓는다는 불만이다. 집을 팔고 싶어도 양도소득세 최고세율이 82.5%에 달해 퇴로가 막혔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무주택자들은 엄살을 떤다고 핀잔을 하기 일쑤다. “집값이 크게 올랐는데 상승분에 비하면 보유세 부담은 미미한 수준이 아니냐”는 것이다.
공공임대주택 건립 예정지 주변의 길가에 걸린 반대 플래카드를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주민들의 행동은 과연 이기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재산을 지키기 위한 본능인가.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짓는 것은 국가적 사업으로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공공임대주택 건립을 반대한다는 뉴스를 들으면 일단 지역 이기주의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막상 이해 당사자가 되면 관점이 달라진다. ‘취지는 공감, 우리 동네는 사절’로 압축된다. 공공임대주택을 짓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필 우리 동네냐는 이중성이다. 공공임대주택 정책 담당 공무원도 임대주택이 막상 자신의 마당 앞에 들어선다면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공공임대주택을 반대하는 사람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편을 무조건 폄훼하지 말라. 물론 무조건 찬성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비판하기 전에 당사자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지사지다. 좀 더 냉철하게 상대방과 나의 입장을 균형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남을 비판하기 전 이 말을 되새기자.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