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벽이 생겨도 넘어서겠다' '앞으로는 웃을 일만 만들겠다'
출사표나 포부 치고는 다소 진부하다. 그러나 이 같은 각오를 다진 배경, 그리고 이를 통한 변화상을 알고 나면 조금 달리 보일 수 있다.
앞에 언급한 내용은 한국 쇼트트랙 간판 황대헌(강원도청)과 최민정(성남시청)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직접 게재한 글의 일부다.
대회 초반 여러 난관 속에서 심신을 다잡기 위해 적은 것인데,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성과를 이뤄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두 에이스는 이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달 색이나 개수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베이징에서 된서리를 먼저 맞은 것은 황대헌이었다. 그는 이번 대회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페널티를 받아 실격되는 아픔을 겪었다.
절묘하게 인코스를 파고든 '스케이팅 기술'을 일순간 '반칙'으로 둔갑시킨 심판의 눈과 기준에 많은 이들이 쓴소리를 날렸다. 현장에서 경기를 중계하던 한국 쇼트트랙 전설들도 '칭찬받아 마땅한 플레이였다'며 핏대를 세웠다.
이로 인한 이익이 하필 개최국 중국에 돌아가면서 판정 논란이 불거졌다. 각국 누리꾼들의 설전까지 벌어지는 등 장외전도 치열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선수단은 경기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4년간 흘렸던 땀의 대가가 그렇게 사라지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분노하고 슬퍼할 때 황대헌은 묵묵히 다음을 기약했다.
그는 SNS에 '벽을 만났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넘어서라'는 내용의 격언을 옮겼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말이었다. 그렇게 심판과 중국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준비과정을 믿고 또 믿었다.
절치부심한 황대헌은 결국 일을 냈다. 이어진 남자 1500m에서 무결점 레이스로 마침내 정상에 섰다.
이 종목은 트랙 13바퀴 반을 돌아야 해 체력 안배가 중요한 데 황대헌은 결승선을 9바퀴나 남긴 상황에서 선두로 치고 나갔다. 이후 한 차례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그대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심판 판정이 개입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지는 경기였다.
황대헌은 이 경기 후 "'판정은 심판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깔끔하게 달리자는 전략을 세웠다. 힘들었지만 응원을 생각하며 견뎠다"고 말했다. 이후 남자 5000m 계주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12년 만에 값진 은메달을 품었다.
모든 경기를 마친 후 더 깊은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황대헌은 귀국 전 현지에서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지금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리는 분들께 에너지를 전달해주고 싶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민정도 마음고생을 했다. 4년 전 의지할 선배가 있었던 것과 달리 이번 올림픽에서 대표팀의 성적을 오롯이 책임질 자리에 있다 보니 중압감이 컸던 탓이다. 평창에서 계주 금메달을 합작했던 동료 심석희(서울시청)가 남몰래 자신을 비하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까지 받고 나선 대회다.
올림픽 전초전이었던 월드컵 대회 땐 무릎과 발목을 다쳤다. 징계와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가 변경되면서 '역대 최약체'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이는 최민정의 신경을 더 곤두서게 했다.
올림픽 무대에선 불운도 이어졌다. 여자 500m 준준결승 당시 넘어져 실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앞서 열린 혼성계주 때도 입상에 실패한 터라 성적에 대한 부담은 배가 됐다. 남자 선수단의 판정 시비까지 겹쳐 대표팀 안팎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평소 감정 표현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달린 탓에 정작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 1000m에서 은메달을 딴 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그가 안았던 부담감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최민정은 SNS에 응원해 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후 '앞으로는 웃을 일만'이라고 적었다. 이는 울더라도 기쁜 일로만 울겠다는 의지 표명과도 같았다.
그렇게 부담감을 내려놓은 최민정은 여자 3000m 계주에서 폭발적인 스피드로 은메달을 일구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는 쇼트트랙 마지막 종목이었던 1500m에서 2연패를 달성하며 대미를 장식했다.
동료(심석희)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최민정은 좋은 성적을 거둔 비결로 또다시 동료를 꼽았다. 그는 "선수들 모두 힘들게 올림픽을 준비했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선수들끼리 뭉치려고 했던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며 웃었다.
한국 쇼트트랙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 두 명의 에이스 덕분에 이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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