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을 청소하는 로봇청소기부터 도로를 달리는 전기차까지 중국 기술이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한때 '저가 대체재'로 여겨졌던 중국 제품은 이제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한국 기업과 정면 승부를 벌이며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안방과 도로를 동시에 점령하기 시작한 중국의 공세는 한국 제조업의 주력 산업마저 흔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메이드 인 차이나' 인식 바꾼 로봇청소기
가전업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로봇청소기 시장이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로보락은 2025년 로봇청소기와 로봇 잔디깎이 등을 포함한 가정용 청소 로봇 부문에서 출하량 580만대, 점유율 17.7%로 세계 1위에 올랐다. 전년(330만대·12.1%)보다 75.8% 늘었고, 상위 5개사도 모두 중국 제조사였다.
국내 존재감은 더 뚜렷하다. 로보락의 한국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8월 기준 50%대 초반, 130만원 이상 고가 시장에서는 70%를 웃돌며 2위 삼성전자(20%대 초반)와 두 배 이상 격차를 벌렸다. 물걸레 자동 세척, 장애물 회피, AI 기반 공간 인식 등 프리미엄 기능을 앞세워 '저가' 이미지에서 벗어난 결과다.
최근 결혼한 직장인 유주경씨(32)는 "냉장고나 세탁기는 삼성전자 패키지로 맞췄지만 로봇청소기만큼은 중국산이 국산보다 낫다는 얘기가 많아서 로보락을 골랐다"며 "신제품 출시 주기가 빠르고 기능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TV 시장에서도 중국 브랜드는 대형·미니LED 라인업으로 국내 프리미엄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다나와의 '2026년 상반기 TV 시장 트렌드 분석 리포트'를 보면 거래액 기준 점유율은 삼성전자(52.3%)·LG전자(38.1%)가 1·2위지만 중국 TCL이 4.5%로 3위에 올라 국내 중소 브랜드를 제쳤다. 아직 프리미엄·메인 시장은 아니지만 세컨드 TV·1인 가구용 보급형 시장을 발판 삼아 영역을 넓혀가는 전형적 진입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는 "메이드 인 차이나는 과거 저가 제품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IT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라섰다"며 "원산지 효과가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중국산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깎아보는 현상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이얼·거리전기와 함께 중국 3대 가전업체인 마이디어(Midea)도 국내 상륙을 본격화했다. 2025년 2월 '마이디어'로 브랜드명을 정하며 정식 진출을 선언한 뒤 올해 3월 벽걸이 에어컨 6종, 4월 스탠드형까지 라인업을 확장했다. 삼성전자 등 국내외 가전업체의 OEM·ODM을 담당해온 이 회사는 2016년 도시바 가전사업부와 독일 로봇기업 쿠카(KUKA)를 인수하며 기술력까지 갖췄다.
국내 상륙은 걸음마 단계지만 본사 차원의 글로벌 확장은 M&A로 속도를 내고 있다. 마이디어그룹은 지난해 5월 스페인 100년 전통 가전기업 테카그룹 인수를 완료해 유럽·중남미 발판을 마련했고 12월엔 해외 의료기기 기업까지 사들여 헬스케어 영역을 넓혔다.
BYD發 균열…승용차 시장 파고드는 중국 자본
도로 위 변화는 더 선명하다. BYD는 지난해 4월 첫 고객 인도를 시작한 지 11개월 만인 올해 3월 누적 판매 1만대를 돌파했다. 수입차 브랜드 중 최단 기록이다. 돌핀·씨라이언7·아토3·씰 4종 라인업을 앞세웠다. 올 상반기(1~6월) 누적 등록대수는 1만1675대로 전년 동기(1286대) 대비 807.9% 급증했고, 점유율도 0.93%에서 6.34%로 뛰어올랐다.
정부는 보조금까지 끊으며 견제에 나섰지만 BYD는 자체 보조금으로 맞서고 있다. '전기차 보급 사업 수행자 선정 평가' 탈락으로 지난 1일부터 국고보조금(모델별 109만~169만원)이 끊겼지만 7월 한 달간 이에 상응하는 금액을 자체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정면 돌파에 나섰다.
BYD가 튼 물꼬로 같은 중국계인 지리(Geely)그룹 계열 브랜드들이 줄지어 진입하고 있다. 프리미엄 브랜드 지커는 지난달 중형 전기 SUV '7X'(5299만~6999만원)를 앞세워 상륙했다. 가격대가 테슬라 모델Y·제네시스 GV70 전동화 모델과 겹친다. BYD가 중저가로 넓혔다면 지커는 처음부터 프리미엄을 내걸었다는 것이 다르다. 7X는 사전 예약 한 달 만에 1000대를 돌파했고 최상위 트림 울트라(6999만원)에 예약이 집중됐다. BYD 프리미엄 브랜드 덴자의 국내 진출 가능성도 거론된다.
중국 자본의 접근 방식은 브랜드 정체성을 지운 BYD식 '직접진출'과 정체성은 남긴 채 자본·기술로 파고드는 '우회방식'으로 나뉜다. 볼보는 2010년 지리그룹에 인수됐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유럽차로 인식된다. 볼보에서 독립한 전기차 폴스타 역시 지리그룹 플랫폼을 함께 쓰지만 북유럽 브랜드로 통한다.
르노코리아의 '그랑 콜레오스'도 비슷하다. 지리자동차는 르노코리아 지분 34.02%를 확보해 2대 주주에 오른 데 이어 볼보·지리가 공동 개발한 CMA 플랫폼 라이선스를 제공했다. 그랑 콜레오스는 중국에서 판매되는 지리 '싱위에 L'을 기반으로 개발돼 차체 구조를 공유한다. 폴스타 역시 부산공장을 생산 거점 삼아 르노·지리 합의로 북미·한국 판매용 전기 SUV '폴스타4'를 생산한다. 프랑스·스웨덴 브랜드의 외형 이면에 중국 자본과 기술, 생산 네트워크가 함께 작동하는 구조다.
서용구 교수는 "전기차는 국내 완성차 중 마땅한 대안이 없고 BYD가 기술적으로 더 뛰어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라며 "국내 기업들도 가격·기술 경쟁에서 밀리는 만큼 AS나 구독형 케어 서비스 같은 감성적 요소로 승부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