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2024년 11월 21일 이후 1년 8개월 만에 800원대로 내려갔다. 24일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 전광판에 100엔당 896원이란 환전비율이 표시돼 있다. / 사진 = 뉴스1


일본 엔화 가치가 40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중동 전쟁 재확산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 미국보다 1.75%포인트 낮은 기준금리의 영향 등이 누적된 결과다. 하지만 이번 주 들어 나타난 엔화 가치 급락에는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나랏빚을 늘려서라도 재정 지출을 확대하겠다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의 '적극재정' 방침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4일 달러 당 엔화 환율은 163.9엔까지 상승(엔화 가치는 하락)했다. 대미 무역흑자 축소를 압박한 미국의 요구로 일본이 엔화 가치를 급하게 끌어올리던 1986년 연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올해 초 156엔에서 출발한 엔-달러 환율은 지난달 초 160엔을 넘어선 데 이어 이번 주 들어서는 163엔대에 진입했다. 일본은행(BOJ)과 정부가 환율 방어에 나서 한 달 간 무려 12조 엔을 쏟아부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21일 각의에서 확정된 '경제·재정 운영과 개혁의 기본 방침(일명 호네부토·骨太, 굵은 뼈대)'이 엔화 약세에 가속도를 붙였다. 일본 정부는 올해 통과시킨 방침에서 '책임 있는 적극재정'을 강조하는 한편, 25년간 사용되던 '재정 건전화' 표현을 '재정의 지속 가능성'으로 완화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국채금리가 급등하고, 엔화 가치는 급락하는 '호네부토 쇼크'가 발생했다. 선진국 중 빚이 가장 많은 나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00%가 넘는 일본이 '빚을 더 내 돈을 풀겠다'고 나선 데 대해 시장이 경고를 보낸 것이다.

이로 인해 줄곧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던 엔화와 원화의 '디커플링'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 주식예탁증서(ADR)의 미 나스닥 상장으로 인해 한국에 달러가 유입되는 효과까지 겹치면서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은 1년 8개월 만에 900원 선 아래로 떨어졌다. 반도체 초호황 으로 세수가 급증하고 있는 한국은 일본과 달리 올해 추가로 나랏빚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은 정부부채 비율이 51% 정도로 일본에 비해 재정 여력이 있는 편인데도, 올해 들어 원화는 엔화와 함께 주요 통화 중에서 유난히 약세를 보여 왔다. 게다가 한국에는 '선진국 중 나랏빚 증가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 다닌다. 언제 꺾일지 예측하기 힘든 반도체 호황만 믿고 정부 지출을 늘린다면 우리도 언제든 원화 가치 급락 등 시장의 역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