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중국 활용법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유럽에 공장을 짓고 현지생산으로 방향을 틀자 유럽연합(EU)은 생산 장소뿐 아니라 부품 조달과 고용, 기술, 지분구조까지 유럽 산업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EU는 2024년 10월부터 중국산 순수전기차에 7.8~35.3%의 상계관세를 추가로 부과해 왔는데 올해부터 관세 외 다른 수단을 병행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EU 집행위는 올해 3월 산업가속화법(IAA)을 제안했고 현재 유럽의회와 EU 이사회가 심의 중이다. 원안은 공공조달이나 보조금 등 공적 지원을 받는 전기차에 대해 EU 역내 최종 조립과 함께 배터리를 제외한 부품 가액의 70% 이상을 EU산으로 채우도록 했다. 배터리는 핵심 부품을 단계적으로 역내산으로 바꾸고, 전기 파워트레인과 주요 전자시스템도 시행 3년 뒤부터 각각 역내산 50%를 채우도록 하는 방안이 담겼다.
이런 변화는 유럽 자동차산업이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폭스바겐그룹은 2030년까지 독일에서만 약 5만개 일자리를 줄이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이달 초에는 그룹 전체에서 약 5만개 직무를 추가로 조정해야 한다는 '퓨처플랜 2030'을 확정했다. 유럽 최대 자동차그룹조차 비용 부담과 경쟁 격화에 맞춰 기존 구조를 다시 짜는 상황이다.
중국 업체들의 성장세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지난 8월 EU와 영국,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을 합친 시장에서 중국 브랜드 점유율은 11.7%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등록 대수는 9만7639대로 1년 전보다 111% 증가했다. 중국 업체들은 EU의 관세 장벽을 피해 단순 수출 대신 현지생산과 합작사 설립으로 대응하고 있다.
유럽은 중국의 전기차·배터리 경쟁력을 외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완성차부터 배터리·부품·소프트웨어까지 중국에 내주고 유럽에서는 최종 조립만 하는 구조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필요한 자본과 공급망은 활용하되 생산과 고용, 기술과 경영권에서 자국 산업의 몫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협력 여부보다 협력의 조건이 관건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은 완성차를 중심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부품업체들의 미래차 전환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산업통상부가 공개한 국가승인통계 '2025년 자동차 부품산업 실태조사'에서 사업전환·다각화를 추진하거나 계획 중인 업체는 전체의 6.1%에 그쳤다. 자금 조달과 기술 경쟁력 부족, 인력 확보 등이 주요 애로로 꼽혔다. 정부가 올해 부품업계 체질 개선에 9조7000억원의 정책금융을 공급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자본과 공급망은 국내 부품사에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중국 브랜드의 국내 진출이 이어지는 만큼 정비용 부품 일부를 국내 업체에서 조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차만 팔지 말고 국내 산업 생태계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중국 업체로서도 국내에 공장을 새로 짓는 것보다 부담이 적다. 공동개발이나 해외시장 동반 진출로 국내 부품사가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중국 업체의 국내 진출을 부품업계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셈이다.
전제는 있다. 기술력 있는 국내 부품사가 자금난 때문에 헐값에 넘어가거나 특정 중국 공급망에 종속돼서는 곤란하다. 완성차가 강해도 부품산업이라는 허리가 무너지면 산업 주도권을 오래 지키기 어렵다. 자본을 받는 대신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남길지에 대한 기준이 먼저다.
중국을 경계하는 것과 활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자본과 공급망은 활용하되 핵심 기술과 경영권, 산업 주도권은 지켜야 한다. 한국 자동차산업이 아직 경쟁우위에 있을 때 협력의 원칙부터 세워 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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