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2026년 정기국회를 개원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야경. /사진=뉴스1


여당 대표가 취임 첫날부터 '불량학생 조희대씨'라는 모욕적 언사를 내뱉고, 야당 대표는 '재명아 봤지'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등 서로 헌법기관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포기한 듯한 '능멸의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1일 개원식을 열고 100일간의 일정에 들어가는 2026년 정기국회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여야 격돌이 전망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예상되는 내년도 예산안은 물론 부동산 공급 정책, 세제 개편안, 사법 개혁, 3대 메가프로젝트 지원 법안 등 여야 간 견해차가 큰 쟁점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더불어민주당은 주요 국정과제 '입법'에, 국민의힘은 정부·여당의 정책과 '입법 견제'에 방점을 두고 있어 서로 막말과 모욕을 주고받으며 '불타는 여의도'를 연출할까 우려된다.

도저히 서로 타협이 불가능해 보이는 대치 상황에서 역사적 거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도도한 시대의 물줄기를 돌렸을까?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년, 1933~1945년 재임)이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단호한 지도자로 통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가하자 다음날 의회 연설에서 "영원히 치욕으로 기억될 날"이라며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해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것으로만 알려졌다.
군국주의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사진=미국 백악관 문서보관소


하지만 호주의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의 저서『개인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에 따르면 미국은 1937년 초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무려 95%가 '자국이 어떤 전쟁에도 관여해선 안 된다'고 응답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고립주의 성향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의회의 통제로 1935년의 한 해 예산 811억 달러 중 국방비는 전체의 1.36%도 안 되는 11억 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의회와 국민을 설득해 인기 없는 전쟁에 참전하도록 이끌 수 있었을까. 멋진 연설 몇 차례 했다고 의회와 국민이 순순히 따라주었을까?



맥밀런은 그런 상황에서 루스벨트가 2차대전에서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군국주의를 격멸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의회와 국민을 상대로 끈기 있게 설득 작업을 펼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루스벨트는 의회와 국민에게 일본 제국주의와 독일 나치즘의 위험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설명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몇 년간 계속된 결과 1939년이 되자 여론이 나치 위협을 받는 영국·프랑스·폴란드에 대한 지원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의회와 국민이 일본과의 즉각 참전에 찬성한 건 이런 오랜 '설득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스벨트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소통·설득·통솔의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역사에 대한 비전과 신념이 있었기에 끈기 있게 기다리며 반대파를 설득해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지도자들에게 절실한 덕목이다. 어떤 새도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에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상이 승선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에 이어 일본 군국주의까지 종말을 고했다.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이들에 대항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종전을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또 하나 주목할 인물이 19세기 프로이센의 총리로 1871년 독일 통일을 이룬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다. '현대 독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를 우리는 부국강병을 강조한 교과서의 영향인지 흔히 '철혈 재상'이라고만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무력 사용과 강경 보수 입장에만 초점을 맞추기 일쑤였다. 하지만 맥밀런은 이를 '비스마르크의 일면만 바라보는 바람에 생긴 오해'라고 지적한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국제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활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1871년 1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독일 통일과 독일제국 설립 선포식을 묘사한 독일 화가 안톤 폰 베르너의 그림. 가운데 흰 옷과 노란띠 차림의 사람이 비스마르크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오래전 만난 적이 있는 영국 출신의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폴 케네디도 같은 입장이었다. 1500년 이래 글로벌 강대국들의 부상·몰락이 경제력·군사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강대국의 흥망』으로 명성을 얻은 국제관계와 강대국 세계전략 분야의 석학이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총리이던 1866년에 내린 결정에 주목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벌여 지금의 체코 남부인 쾨니히그레츠(체코어로 자도바)에서 압승을 거뒀다. 승리에 도취한 프로이센군 지휘관들은 곧바로 빈을 점령해 "황제의 수염을 뽑아버리자"고 외쳤다. 당시 프로이센의 무력으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1866년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를 괴멸시킨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묘사한 독일 화가 게오르크 블라이프트로이의 그림. /사진=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냉철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인에게 더 이상의 모욕을 주면 안 된다. 미래에 그들이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당시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빌헬름 2세 왕자를 설득해 빈 점령과 오스트리아 모욕을 막았다. 훗날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오스트리아가 적어도 중립을 지키도록 패자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이를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Realpolitik)'로 부른다. 이념이나 도덕·감정 대신 오직 국익과 권력관계만을 정치와 외교의 기준으로 삼은 철저한 실용주의 정책을 뜻한다. 1866년 사례에서 프로이센을 여당에, 오스트리아를 야당에 대입하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실과 많이 닮았다.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펼친 현실정치는 큰 보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의 중립으로 배후 안전을 확보한 프로이센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4년 뒤인 1870~71년 숙적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의 항복을 받았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수도 파리를 포위한 채 인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힘을 앞세운 감정적인 모욕이나 승전 퍼레이드가 아닌 먼 날의 큰 목표인 독일 통일을 내다본 것이다. 상대를 능멸하지 않고 존중한 것은 힘이 없거나 소심한 게 아니라 깊은 사유와 세상을 읽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도 지금 당장 눈앞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 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지혜를 갖고 모욕과 막말을 버리고 존중의 정치를 펼칠 것으로 기대해본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