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이나 커피가 옷에 묻으면 잘 안 지워지잖아요. 녹차도 그렇고요. 폴리페놀은 원래 표면에 잘 달라붙습니다. 샴푸도 같은 원리예요."
샴푸는 머리를 감고 나면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간다. 그 안에 든 좋은 성분들은 두피와 모발에 남아 있을까. 이해신 카이스트(KAIST) 화학과 석좌교수(53)는 이 질문에 와인과 커피를 예로 들었다. 우리가 평소 지우지 못해 애를 먹었던 얼룩의 성질을 거꾸로 이용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와 연구진이 폴리페놀 접착 기술을 적용해 개발한 탈모증상완화 기능성 샴푸 그래비티가 출시 27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270만병을 넘겼다. 2024년 4월 출시된 그래비티는 1년이 되지 않아 올리브영 온라인몰 입점 39분 만에 준비 물량을 모두 팔았고, 오프라인 입점 직후 헤어케어 1위에 이어 전체 상품 랭킹 1위에 올랐다. 정가 3만8000원짜리 제품이 리셀 시장에서 20만원대에 거래되더니 모조품까지 등장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품절 마케팅 아니냐'는 항의가 나왔다. 과학자가 직접 만든 샴푸가 출시 2년이 안 돼 헤어케어 시장을 뒤흔든 것이다.
이 교수는 20년 가까이 폴리페놀을 연구한 과학자다. 지인들 사이에서는 '폴친자'로 불린다. 폴리페놀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샴푸를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물속에서 바위에 단단히 붙는 홍합의 접착 원리를 연구하다 천연 폴리페놀이 단백질과 결합하면 접착성을 띤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다 인체의 대표적인 단백질 성분인 머리카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폴리페놀이 여러 표면에 잘 붙는다면 모발에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온 특허 성분 'LiftMax 308™'을 적용한 헤어케어 브랜드가 '그래비티'다.
이 교수는 연구를 상용화하기 위해 폴리페놀팩토리라는 회사를 차렸고 그와 뜻을 같이 한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실로 하나둘 모였다. 김은우 연구원(30)은 충남대에서 천연 재료를 연구하다 폴리페놀을 만나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긴 경우다. 그는 "폴리페놀을 연구하면 이해신 교수를 모를 수가 없다. 박사 과정은 제일 본토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왔다"고 말했다. 양한열 선임연구원(38)과 주혜린 객원연구원(25)도 비슷한 경로로 모였다.
처음 그래비티가 출시됐을 때는 핵심 원료 대량 생산 설비가 없어 과학자들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석·박사급 연구원들이 낮에는 연구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사내수공업으로 원료를 만드는 생활이 약 6개월간 이어졌다. 1000병 분량의 원료를 만드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 교수는 당시 작업을 "떡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고 표현했다. 접착성이 강한 물질을 용기에 넣고 사람이 쳐서 만들었다. 장갑은 원료를 버티지 못했고 손에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 떼어내다가 피부가 벗겨졌다. 그렇게 만들어도 주문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로봇팔을 샀지만 생각처럼 로봇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양 선임연구원은 "로봇은 사람처럼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방향을 바꾸려면 속도부터 줄여야 했다"며 "그러다 보니 정작 필요한 찰랑거림이 안 나왔다"고 돌아봤다. 이후 생산 방식을 바꾸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공정을 자동화했다. 현재 그래비티는 미국·일본·영국 등 9개국 이상으로 판매되고 있다.

그래비티의 효과는 미용실에 가면 뜻밖의 방식으로 확인된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이 모발 표면을 단단하게 코팅하기 때문에 샴푸를 계속 사용한 상태에서는 펌이나 염색이 잘 안된다"며 "펌제와 염색약이 모발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코팅층이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펌이나 염색을 할 경우 사흘 전부터 그래비티 사용을 중단하라고 권했다. 반대로 일단 펌이 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시 그래비티를 사용하면 모발에 힘이 생겨 웨이브가 쉽게 처지지 않고 오래 유지되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물질을 머리카락 말고 다른 곳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폴리페놀은 불에 잘 타지 않는다. 이 교수는 "산불이 난 뒤에도 민둥산이 되지 않고 고목의 껍질이 남아 있는 모습이 대표적인 사례"라며 "그 껍질에 있는 성분이 바로 폴리페놀"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 성질을 살려 방화복이나 난연 벽지 같은 인테리어 소비재로 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교수와 연구원들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폴리페놀의 가능성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한 물질을 연구한 끝에 얻은 것은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그 물질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 보는 눈이었다.
연구를 상업화에 성공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선배 과학자로서 해주고픈 조언이 있는지 물었다. 이 교수는 "제품은 가능한 한 빨리 내는 게 맞다"며 "허가가 많이 필요한 분야보다는 문턱이 낮은 것부터 시장에 내놓고 반응을 보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그래비티의 성공은 20년 가까이 이어진 기초과학 연구가 연구실 안에 머무르지 않고 특허와 제품,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교수와 연구팀은 폴리페놀이라는 하나의 물질을 오랫동안 파고든 끝에 소비자가 직접 체감하는 제품으로 만들어냈다.
연구실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선택받는 상품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뒤따른다. 그래비티 연구팀의 도전은 기초과학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해신 카이스트 화학과 석좌교수
1973년 출생
현재 KAIST 화학과 석좌교수·생체모방 나노소재 연구실 책임교수
2023 폴리페놀팩토리㈜ 창업·대표이사 (KAIST 교원창업)
2021 GluGene Therapeutics 최고과학책임자(CSO)
2010 ㈜이노테라피 공동창업·최고기술책임자(CTO)
2008 미국 MIT 박사후연구원
2008 미국 노스웨스턴대 생명의공학(Biomedical Engineering) 박사
1997 KAIST 생명과학과 학사
1993 KAIST 생명과학과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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