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최근 한국의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싱가포르의 문화 연구 기업 '크로스커런트'와 함께다. 브랜드와 혁신을 축으로 아시아 각국의 문화 트렌드를 분석하며 '베트남=하이브리드 차(茶) 붐' '인도네시아=민속 공포물 열풍' 식으로 국가별 특이 주제를 뽑았는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플레이브와 버추얼 아이돌의 확장'을 하기로 했다.

연구를 해나가며 여러 번 놀랐다. 일단, 올해는 한국 버추얼 가수 역사의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전수 조사 결과, 2026년 1월부터 9월 현재까지 데뷔한 국내 아이돌 그룹 45개 팀 가운데 10개 팀이 버추얼 아이돌이다. 20%를 상회하는 수치로, 올해 대한민국에서 데뷔한 아이돌 다섯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란 뜻. 솔로 아이돌 가수까지 합치면 48개 팀 중 12개 팀, 즉 1/4이 버추얼이다.



2026년 버추얼 아이돌의 '퀀텀 점프'를 추동한 건 뭘까. 플레이브의 입지전이 단단히 한몫 했다. 2023년 데뷔한 이 5인조는 '그래봐야 만화 캐릭터'라는 일각의 비웃음을 가볍게 비웃으며 지난해 밀리언셀러(단일 음반 100만 장 이상 판매)를 달성했다. 인기 (인간) 그룹 데이식스도 데뷔 10년 만에 입성한 고척스카이돔에 단 2년 8개월 만에 들어가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이제 플레이브보다 인기 있는 한국의 인간 그룹은, 몇 팀 없다.

한국의 가상 가수 역사는 올해로 28년 됐다. 1998년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이 시초다. 미남 배우 원빈을 닮게 만든 아담은 록 발라드 '세상엔 없는 사랑'을 히트시키며 1집을 당시 20만 장 넘게 파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 이후 류시아, 사이다, 인츠 등이 나왔지만 그래픽은 조악하고 채산성은 낮아 소비와 생산 양면에서 외면받았다. 근년에 기술의 발달, 팬데믹 영향으로 버추얼 셀럽이나 가수가 출사표를 던졌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불편한 골짜기'를 호소하는 댓글이 달리기 일쑤였다.

플레이브는 아담 이후 유일하게 성공한 버추얼 가수다. 이젠 아담을 훌쩍 뛰어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버추얼 가수 자리에 올랐다. 웬만한 인간 아이돌을 능가하는 확실한 대표주자가 튀어나오니 이 판에 돈이 들어온다. 올해 버추얼 아이돌이 10개 팀 이상 나오게 된 배경이다. 유명 투자회사들이 신생 버추얼 가수 제작사들에 수십억 원 규모의 프리시리즈A, 시리즈A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기 (인간) 그룹 키스오브라이프의 초기를 다진 이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오위스', SM엔터테인먼트의 두 자회사인 SM엔터테인먼트 재팬과 스튜디오 리얼라이브가 합작해 일본에 데뷔시킨 '키에피' 등은 인간 아이돌 제작의 노하우가 버추얼 아이돌 생산에 직접 흘러 들어간 케이스다.



버추얼과 인공지능(AI)의 결합도 시작됐다. 7월 데뷔한 슬릭트(SLIKT)는 'AI 아티스트 프로젝트' 리프트(ryft)의 첫 주자다. AI 기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이 차별점이다. 팬들이 플랫폼에 글을 올려 함께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사이버 가수 아담이 '에덴'에서 온 것처럼, 슬릭트 등 캐릭터는 'AI가 만든 존재'로, 팬은 '소환자'로 설정돼 있다.

지난해 플레이브 신드롬에 즈음해 난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근미래에 인간 가수와 가상 가수의 라그나뢰크, 즉 최종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승자는 버추얼일 수도 있다.' 그 근미래가 생각보다 더 '근(近)'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AI 속도 조절론이 대두한다. 우리 음악계에선 버추얼과 AI가 쫓아온다. 인간은 어디로 달릴 것인가. 질주하는 기술 시대. 곁눈질로 백미러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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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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